이 작품은 민영익이 상해서단에서 활동한 시기인 중기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보인다. 오창석吳昌碩과 포화蒲華와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고 가장 많은 작품들이 제작된 시기로, 자주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당시 청나라를 풍미하고 있던 석도나 축윤명의 그림을 자주 보고 참조 하기도 하였던 시기이다. 특히 상해에 마련한 천심죽제千尋竹齋에서 수많은 난을 재배하는 등 난에서 얻은 기운생동함을 사의적으로 표현 하였다.
본 작품을 살펴보면 화면 중앙에 두 포기의 난이 배치되어 있다. 일엽다화一葉多花의 혜란蕙蘭을 그렸는데, 그 시기에 많이 그렸던 난의 표현이었다. 담묵淡墨으로만 난엽이나 난화를 그려 넣었다.꽃은 중기의 주된 특징인 초생달 모양으로 표현하고, 꽃봉우리는 새의 눈과 같이 표현하여 중앙에 농묵濃墨으로 눈동자 같이 처리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도 나타났던 특징처럼 이 시기에도 삼전법三轉法으로 난을 치기도 하였고, 난엽끝이 뾰족하게 마무리 하였다. 원숙한 필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난에 대한 묘사가 한층 발전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화면 오른편 하단에는 ‘園丁寫’라고 관서되어 있는데, 30대 이후 상해에서 활동한 시기부터 활용한 아호雅號이며, 서강대학교 박물관 소장 묵란도와도 유사함이 느껴진다.
[참고문헌] 김혜겸,「원정 민영익의 묵란 변천 연구」 (원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