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허련이 쓴 추사 김정희 作 『제석파난권題石坡蘭卷』으로, 이 글은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 권6에 들어 있다.
題石坡蘭卷 석파의 난권에 쓰다.
寫蘭最難 山水梅竹花卉禽魚 自古多工之者 獨寫蘭無特聞 如山水之宋元來南北名蹟 不一二計 未聞王叔明黃公望並工蘭 竹之文湖州 梅之揚補之 亦無並工蘭 盖蘭自鄭所南始顯 趙彝齋爲最 此非人品高古特絶 未易下手 文衡山以後江浙間遂大行 然文衡山書畵甚多 其寫蘭又不十之一二 其罕作可知 所以不可以妄作橫掃亂抹 如近日之無少忌憚 人皆可以爲之也 鄭所南所畵 甞及見之 今世所存纔一本而已 其葉其花 與近日所畵者大異 不可以妄擬仿摹 趙彝齋以後尙可以求其神貌蹊徑 至於仿橅 又猝不可能 所以鄭趙兩人人品高古特絶 畵品亦如之 非凡人可能追躡也 近代陳元素 僧白丁 石濤 以至如鄭板橋 錢籜石是專工者 而人品亦皆高古出群 畵品亦隨以上下 不可但以畵品論定也 且從畵品言之 不在形似 不在蹊逕 又切忌以畵法入之 又多作然後可能 不可以立地成佛 又不可以赤手捕龍 雖到得九千九百九十九分 其餘一分最難圓 就九千九百九十九分 庶皆可能 此一分非人力可能 亦不出於人力之外 今東人所作 不知此義 皆妄作耳 石坡深於蘭 盖其天機淸妙 有所近在耳 所可進者 惟此一分之工也 余推鹵甚 今又頹唐無餘 鸞飄鳳泊不 已二十餘年 人或來要 一切謝不能 如枯木冷灰無復生趣 見石坡所作 有河南見獵之想 雖不能自作 以前日所知者 率題如是寄付 石坡須專意並力 更不使此退院老錐强所不强 有勝於吾之自作 人之欲求於吾者 皆於石坡求之可耳
난蘭을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 산수山水, 매죽梅竹, 화훼花卉, 금어禽魚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그에 능한 자가 많았다. 그러나 유독 난을 그리는 데는 특별히 소문난 이가 없었다. 이를테면 산수로서 송원宋元 이래 남북南北의 명적名蹟이 하나, 둘로 헤아릴 바가 아니나 왕숙명王叔明, 황공망黃公望이 모두 난마저 잘 그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대나무의 문호주文湖州와 매화의 양보지楊補之도 역시 난초만큼은 잘하지 못했다.
대개 난초는 정소남鄭所南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어 조이재趙彝齋, 趙子固가 으뜸이 되었으니 이는 인품이 고고高古하고 특절特絶하지 않으면 손을 대기가 쉽지 않다.
문형산文衡山 뒤로는 강절江浙 지방에서 마침내 크게 유행되었다. 그러나 문형산은 서화가 매우 많으며 그가 난초를 그린 것 또 그 작품의 열에 하나, 둘도 안 되니 이는 그가 매우 드물게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함부로 그려 횡소난말橫掃亂抹하기를 요즘처럼 조금도 꺼림이 없이 사람마다 다하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정소남이 그린 것을 일찍이 본 바 있는데 지금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겨우 한 본本일 따름이다. 그 잎과 그 꽃은 근자에 그린다는 이들과는 너무도 달라서 함부로 본뜰 수도 없으며 조이재 이후로는 되려 그 신모神貌와 지름길을 찾을 수는 있으나 흉내를 내는 것에 이르러서는 또 갑자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정과 조 두 사람은 인품이 고고하고 특절하므로 화풍도 역시 그와 같아서 범인으로는 쫓아가 발을 밟을 수 없는 것이다.
근대에는 진원소陳元素, 승僧 백정白丁, 석도石濤로부터 정판교鄭板橋 전택석錢籜石 같은 이에 이르러는 본래 난초를 전공한 이들로서 인품 또한 다 고고하여 무리에 뛰어났으므로 화품 또한 따라서 오르내리게 되며 단지 화품만을 들어 논정할 수는 없다.
우선 화품으로부터 말한다면 형사形似에도 달려 있지 않고 지름길에도 달려 있지 않으며 또 화법만 가지고서 들어가는 것을 절대 꺼리며 또 많이 그린 후라야 가능하고 당장에 부처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구천 구백 구십 구분까지 이르러 갔다 해도 그 나머지 일분이 가장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려우며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거의 다 가능하겠지만 이 일분은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리는 것은 이 의를 알지 못하니 모두 망작妄作인 것이다.
석파는 난초에 깊으니 대개 그 천기天機가 청묘淸妙하여 서로 근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갈 것은 다만 이 일분의 공工이다.
나는 몹시 노둔鹵鈍한데다가 지금은 또 여지없는 전복顚覆의 신세라서 난표봉박鸞飄鳳泊이 되어 그리지 않은 지 하마 이십여 년이다. 사람들이 혹 와서 요구하면 일체 못한다고 사절하여 마치 마른 나무와 차가운 재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과 같았는데 석파가 그린 것을 보니 하남河南 선생이 사냥꾼을 본 생각이 든다.
그래서 비록 스스로 그리지는 못할망정 전일의 아는 것을 들어 경솔히 쓰기를 이와 같이 하여 석파에게 부치는 바이니 모름지기 뜻과 힘을 오로지하여 나감과 동시에 다시는 이 퇴원退院 노추老錐로 하여금 더하지 못할 것을 더하도록 하여 나의 자작自作에 나음이 있게 말 것이며 사람들이 나에게 요구하고 싶어하는 자는 석파에게 요구함이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