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중국 역사상에 어느 시대보다 풍부하고 찬란하게 문학창작 활동이 이루어진 건륭(乾隆, 재위 1735-1795)대의 영향으로 조선 또한 문인 문화가 확산되었고 양반의 수가 증가하면서 문방구류의 생산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조선은 문화적 전성기를 맞으며 가까이할 수 있는 기명들의 다양한 변화와 함께 수요자들의 개성에 맞는 형태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본 작품은 모서리가 예리하게 깎인 납작한 장방형長方形에 백색의 유색을 띠는 백자 벼루이다. 상면 위쪽에는 청화로 「사연賜硏 : 벼루를 하사하다.」라고 쓰여있으며 하단 측면에는 「신미중하辛未仲夏 : 신미년 음력 5월」명이 해서체로 쓰여있어 ‘신미년 음력 5월에 임금이 본 벼루를 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이 담기는 연지硯池는 장수와 길상의 상징인 구름의 모양으로 절도 있게 조각되어 있다. 벼루의 상면에는 약간의 반점들이 보이며 하면에는 유약을 닦아내고 내화토를 받쳐 구운 흔적이 있다. 유백색으로 부드러움을 지니지만 이지적인 냉철함이 공존하는 문기를 담은 본 벼루는 당시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백자 벼루의 양상을 살펴보는데 자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기년명을 지닌 본 벼루는 1751년(영조 27) 금사리金沙里가마(1726-52)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연간은 문인 취향의 도자들이 성행하였으며 특히 영조는 왕세자 시절 사옹원司饔院 도제조都提調를 7년간 지냈고, 도자기 제작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고 한다. 금사리 가마에서 구워 낸 도자기들은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기품과 절도가 있는 작품이 다수 제작된 시기로 평가된다.
1751년 음력 5월, 영조는 원손元孫 이정(李琔, 1750.9-1752.4)을 태어난 지 만 1년이 안된 시기에 책봉하여 왕세손王世孫으로 삼았다. 그만큼 왕세손에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일각(日角, 귀인貴人의 상相)은 서기瑞氣를 보이며 덕우(德宇, 너그러운 품성)는 중성重星의 밝음을 이었고 하늘은 징조를 나타내어 태어나던 집에서는 한밤중에 빛이 뻗치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조종祖宗의 남기신 은택을 생각하니, 백 년 만의 두 번의 경사이다… 모습과 거동은 어려서부터 매우 숙성하여 온문(溫文, 온화하고 운치가 있음) 하다는 칭찬이 벌써 드러났고, 뛰어난 이해력은 미처 말을 배우기 이전에 먼저 열려 글 읽는 소리를 좋아하는 듯하였다… 하늘의 돌보심을 힘입어 이런 경사慶事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영조가 왕세손 책봉일에 맞추어 어린 왕손의 장수를 기원하며 하사한 작품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卷73, 英祖 27年 5月 13日
[수록처]
조선관요박물관, 『조선도자수선』, 2002, 도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