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전螺鈿의 변천은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얇게 간 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려내어 기물器物의 겉면에 박아넣어 장식하는 칠공예 장식기법의
하나로, 넓은 뜻으로는 대모玳瑁, 호박琥珀, 상아象牙, 보석 등을 새겨 넣어 장식하는 것을
나전이라 일컫기도 한다. 나전에 관한 문헌상의 첫 기록으로는 11세기에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이 요遼 왕실에 나전칠기를 선물로 보냈다는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기록이다. 12세기 초부터는 교빙지交聘志에 고려의 나전제품이 빈번하게 기재된다. 특히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실린 나전에 관한 내용이 주목할 만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은 고려 인종(仁宗, 재위 1122-1146) 때 중국 송宋 사신인 서긍(徐兢,
?-?)이 사절使節로 와서 고려의 문물을 보고 지은 것으로, 당시 고려의 문물과 풍속, 각종
문화를 세세하게 기록한 자료이다. 문헌에는 향로香爐, 병, 호壺, 준尊, 나전 등 다양한
기명이 등장하는데, 특히 고려의 나전에 대해 ‘솜씨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고
극찬하고 있다.1)
본 출품작은 직사각형 형태에 함의 뚜껑 가운데가 볼록 솟아 반원형의 곡선을 이루고 있다.
목재에 흑칠을 하고 바닥을 제외한 몸체 전면에 C자형의 나전과 꼰 황동선을 사용하여
국화당초문으로 장식하였다. 몸체의 앞뒷면에는 두 개의 꽃이, 옆 측면 양쪽에는 한 개의
꽃이 각각 배치되었다. 배치된 국화무늬의 꽃술은 마름모꼴의 나전이며 1장의 꽃잎으로 구성되었다. 뚜껑의 윗면은 몸체와 동일한 두 개의 국화당초, 뚜껑의 앞뒷면에는 두 개의 꽃무늬, 측면에는 한 개의 작은 국화당초가 장식되었다. 일본 나라박물관 학예실장 및 관장을 지낸 고려나전의 권위자 가와다 사다무[河田貞, 1935-2014] 선생의 애장품이었으며, 그의 친필 원고까지 더해져 국내로 환수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본 작품은 고려와 조선의 전형적인 나전 가운데 15세기 전후에 걸쳐지는 과도기적 유물로, 고려나전의 특징인 정묘精妙한 나전 배치와 금속선의 병용倂用에 따른 당초무늬 표현을 고스란히 답습한 유물 중 하나이다. 유사한 예로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나전칠국화넝쿨무늬원형합>[참고도판1], 일본 효고현의 개인소장인 <나전칠국화넝쿨무늬함>[참고도판2], 일본 문화청 소장으로 큐수국립박물관[九州国立博物館]에 기탁한 <나전칠국화넝쿨무늬상자>[참고도판3] 등 몇 점을 꼽을 수 있겠으나, 국화당초무늬와 함께 금속선을 병용한 것은 본 유물의 나전함이 유일하며 이후 고려와 조선의 나전연구에 있어서도 대단히 시사하는 바가 많은 귀중한 사례가 될 것이라”전했다.
또한, 동국대학교 박물관장 최응천은 “보존상태에서 시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지만, 원형을 손상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가치가 돋보인다. 고려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고려말 또는 조선 극초기 작품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본 나전함과 가장 유사한 형태의 유물로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나전칠국화넝쿨무늬원형합>[참고도판1], 일본 효고현의 개인소장인 <나전칠국화넝쿨무늬함>[참고도판2]을 꼽았다. 그 이유는 고려나전의 특징인 국화와 넝쿨문紋의 표현이 작고 균일하며 이를 둘러싼 해조문蟹爪紋은 짧고 도톰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두 전문가의 의견으로 보아, 본 출품작은 고려나전의 전통을 계승하는 과도기적 유물의 오랜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며, 이후 고려와 조선의 나전 연구에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라 하겠다.
1) 삼성미술관 Leeum ,『세밀가귀 : 한국미술의 품격』(Leeum, 2015), p.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