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회 마이아트옥션 경매

일시
2021-11-25 16:00
장소
마이아트옥션하우스
연락처
02-735-1110/9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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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단포 신사열
와유첩 상세보기
종이에 수묵담채
31×17㎝
추정가
KRW  
80,000,000 - 200,000,000
USD  
JPY  
작품문의
T. 02-735-1110 / 9938 F. 02-737-5527 M. myart@myartauction.com
작품설명
본『와유첩臥游帖』은 1700년대 강세황(姜世晃, 1713-1791), 허필(許佖, 1709-1768), 채제공(蔡濟恭, 1720-1799)과 함께 ‘안산십오학사安山十五學士’인 신택권(申宅權, 1722-1801)과 교유하였던 단포 신사열(丹圃 辛師烈, ?-?)의 산수도 16폭이 담긴 화첩이다. 『한국회화대관』에 따르면 신사열은 산수를 잘 그렸고 화훼, 초충에도 능하였다. 유작 중에는 <춘경산수도春景山水圖>와 <수선괴석도水仙怪石圖> 및 <초충도草蟲圖>가 있고 이들의 필치가 청아한 가작佳作이다. 그밖에 <산수도山水圖>등이 약간 전한다. 각 폭에는 칠탄 이광려(七灘 李匡呂, 1720-1783)의 화제가 쓰여있으며 본첩의 소장인이자 그의 족친인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 - 1777)로 추정되는 묵서와 발문이 있다. 이광려는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문인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고구마재배에 성공을 거두게 한 밑바탕이 되었다. 표지는 오동나무로 제작하고 음각으로 ‘臥游帖’이라 새겼다. 신사열의 작품은 매우 희소하 여, 알려진 작품 중에는 인천시립송암미술관 소장인 <어유도魚游圖> 두 폭 정도가 있다. 본 출품작은 신사열의 그림이 한데 모여 엮인 작품으로 그의 회화적 기량이 대단히 뛰어 남을 알 수 있으며, 작품 상태 역시 매우 좋아 더욱 의미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3폭] 伊川翁自謂 不解看畵 此玩物之戒也 顧余衰老多病 閉門深居 時抽畵卷 靜對黙閱 想像山水之幽遠 心會身融 不覺身與畵之有別 此豈衰病閒養者之可闕哉 然苟無觀物玩理之識 而徒爲娛目消遣之具 則子固書畫 終覺多 事少文 臥游祗是按排 還不若袁安雪臥 仲蔚蓬蒿之爲高也 帖中所題 羅景綸語八節 拙筆也 古人詩七句 李友 聖載筆也 辛卯臘月 主人翁書 이천(伊川, 程頤) 옹翁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림을 볼 줄 모른다.”라 한 것은 완물玩物*을 경계한 것이다. 돌아보니 나는 늙어서 병까지 잦은 사람이다. 문을 닫고 깊이 들어앉아 수시로 그림첩을 꺼내 조용히 펼쳐 가만히 구경하면서 그윽한 산수를 상상하고 자세하게 이해함에 나 자신과 그림이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것이 어찌 늙고 병들어 편안히 수양하는 이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겠는가? 그러나 진정 사물을 살피고 이치를 탐구하는 학식은 없으면서 그저 눈으로만 즐기고 시간이나 보내는 도구로 삼는다면 자고子固*의 서화書畫라도 끝내 고사故事만 많고 아름다운 것은 부족하다 할 것이요, 누워서 마침내 이리저리 나누기만 한다면 이는 도리어 원안와설袁安臥雪*이나 중울봉호仲蔚蓬蒿*했던 고상高尙함만도 못할 것이다. 첩帖 안에 써둔 제목인 나경륜羅景綸*의 어록 여덟 글자는 내가 쓴 졸필拙筆이요, 고인古人들의 시 일곱 구는 내벗 이성재李聖載*가 쓴 것이다. 신묘년(영조41, 1771) 8월에 주인主人 옹翁*이 쓰다. * 이 화첩은 이광사가 1771년(67세)부터 소장하였다. * 완물상지玩物喪志에서 나온 말로 ‘작은 기예에 탐닉한 나머지 원대한 뜻을 잃는 것’을 말한다. 송유 사양좌宋儒 謝良佐가 사서史書를 잘 외우며 박학다식한 것을 자부하자, 정명도程明道가 “잘 외우고 많이 알기만 하는 것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본심을 잃는 것과 같다. 以記誦博識 爲玩物喪志”고 경계한 말이다. * 자고子固는 왕안석王安石의 어릴 적부터 친구로 당송팔가唐宋八家의 한 사람인 증공(曾鞏, 1019-1083)의 자이다. * 원안(袁安, ?-92)의 자는 소공邵公이며, 여양汝陽 사람이다. 원소袁紹 등을 배출한 여남 원씨의 시조이다. 한나라 장제章帝 때 사도司徒를 지냈다. 젊은 시절 은거했을 때 한번은 대설이 내려서 식량도 구할 수 없었는데, 굶주림을 참으면서 집 안에 누워 있었다. 낙양 영洛陽令이 걱정하여 문안하였으나 나와 보지도 않았다. * 벼 슬 하 지 않 고 집 에 있 는 것 을 말 한 다 . 장 중 울 張 仲 蔚 은 후 한 後 漢 사 람 으 로 어 려 서 부 터 같 은 고 을 의 위 경 경 魏 景 卿 과 함 께 몸 을 숨 기 고 벼 슬 하 지 않 았 는 데 , 박 학 다 식 博 學 多 識 하 여 천 문 天 文 에 정 통 하 고시부詩賦에 능했다 한다. 그런데 늘 빈한貧寒하게 사는 그 집에 사람의 키를 넘을 정도로 쑥대가 우거졌으므로 “중울봉호仲蔚蓬蒿”라는『 몽구蒙求』의 표제가 전해 온다. * 경륜景綸은 송宋 때의 대학자인 나대경羅大經의 자字이다. * 성재聖載: 이성재李聖載는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의 문인門人인 칠탄 이광려(七灘 李匡呂, 1720-1783)의 자字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참봉을 지냈다, 하곡 문하에서 문인으로 일세一世에 이름을 드날린 사람은 이광려李匡呂와 이광사李匡師이다.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만년에 참봉 직함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조선 후기의 최고의 실학자 이덕무는 ‘그 이름이 온나라에 가득 찼으며, 그의 시 솜씨는 당세의제 일인자’라 칭송하기도 했다. 李進士匡呂, 字聖載, 詩雅重深潔, 名滿一國, 或云詩爲當世第一. 정약용과 교유한 이학규李學逵는 ‘근세의 시와 문장으론 마땅히 시로는 이참봉과 문장으론 박 연암으로 한 시대의 명문장가라 여겨야 한다. 近世詩文, 當以李參奉朴燕岩爲一代名家. 이와같이 영정조 연간에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시작詩作을 다수 남기지는 않았다. 극옹 이만수는 ‘그는 스스로 호를 일컫지도 않았으며, 스스로 문을 숭상하지도 않았으므로 남겨 둔 시문이 없었던 탓이다. 先生未嘗自號, 亦未嘗以文自喜, 無巾箱之蓄. -李晩秀,「李參奉集序」라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그는 해박한지식으로 활발한 일본과의 교류를 하였는데 당시 일찍부터 고구마재배에 열성 이었다고『군방보群芳譜』에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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