望白雲洞出艸圖
丙午秋日 登北麓 望 白雲洞 出艸 庚戌暮春 了當 병오년(1726) 가을에 북쪽 기슭에 올라 백운동을 바라보며 밑그림을 그렸고, 경술년(1730) 늦은 봄에 마쳤다.
[인문] 謙齋, 千金勿傳
丙午秋日 登北麓 望百雲洞出艸 庚戌暮春 了當
병오년(1726) 가을날 북쪽 기슭에 올라 백운동을 바라보며 밑그림을 그렸고, 경술년(1730) 늦은 봄에 마쳤다.
1714년 관직에 첫 출사한 겸재는 한성주부漢城主簿를 거쳐 1721년 경상도 하양현감河陽縣監(종 6품)을 지냈었는데, 본 작품은 5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온 1726년 가을에 그린 작품이다. 백운동은 창의문彰義門 아래 인왕산仁王山과 북악산北岳山 자락이 마주치는 북동쪽 끝자락에 위치하는데 계곡이 깊고 바위 절벽이 아름다워 명승지名勝地로 이름이 높았다. 워낙 이름이 알려져 권문세가權門勢家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기에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의 형부로 권세를 누렸던 이염의(李念義, 1409-1492)도 이곳에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작품에 보이는 초옥들 사이로 보이는 기와집이 이염의의 저택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백운동의 경치와 그 사이에 자리한 가옥과 관련해서는 김수온(金守溫, 1410-1481)과 강희맹(姜希孟, 1424-1483) 등의 시가 전해진다.
金守溫詩:“途人但見衆峯靑,豈識侯家向此成?藤蔓曲藏蛇虺蟄,石門高掩馬牛行。笙歌樓閣傾冠蓋,泉石膏肓養性情。燕罷客歸山月出,一軒淸景也難名。” “曾謁雲從舊院坊,萬家鱗集鬧難當。何年徙宅歸來計?今日逢君笑語香。數頃鶯花春後老,滿池楊柳雨餘長。縱耽野趣朝參懶,人道行當入廟堂。”
“길 가는 사람은 다만 뭇 오리 푸른 것만 보는데, 이곳에 공후의 집이 여기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 등 덩굴 굽어져서 뱀, 구렁이 감추었고, 돌문은 높아서 지나가는 소와 말을 가리 울만 하네. 풍악 소리 누대엔 높은 귀인들 많이 모였는데, 물과 바위에 빠져들어 성정(性情)을 수양했네. 잔치 끝나고 손님 돌아가는데, 저 산 위에 달 뜨니 한 누각 아름다운 경치 무엇이라 형용하리. 일찍이 종로거리 옛집에서 만났는데 일만 인가 비늘처럼 다닥다닥 소란하기도 하였지. 어느 해에 집을 옮겨 ‘한가한 데’로 돌아왔다. 오늘 와서 그대 만나니 웃음과 이야기 향기롭구나. 두어 이랑 아름다운 꽃 봄을 지나서 늙었는데, 연못가에 가득 늘어진 버들 비 온 뒤 길어졌네. 산야의 운치 즐겨서 조회에 참예하기 게으르나, 사람들은 장차 묘당에 들어갈 것이라 말들 하는구나.”
김수온,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 한성부漢城府, 「백운동」
화제에 따르면 겸재가 초안을 그리기 위해 자리를 잡았던 곳이 북악산 기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백운동>의 시점보다 남쪽에 위치한 곳에서 보고 그렸을 것이라 생각된다.
<백운동>에서는 둥글고 원만하게 나타낸 산세에 수묵과 채색을 가하여 정선 특유의 개성이 돋보인다. 인왕산 둔덕에 자리한 부벽준斧劈皴의 암산과 미점을 찍어낸 토산에선 겸재의 전형적인 화풍이 드러나며 작품 전경에 세필로 묘사한 나귀를 타고 가는 인물에서는 겸재의 섬세한 필선이 드러난다. 김수온의 글에 묘사된 연못가는 작품 내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가옥 앞에 위치한 버들과 산야의 운치로 보아 절경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동팔경첩》의 <창의문>에는 창의문 위로 초루를 갖춘 것을 볼 수 있으나 본 작품에는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1741년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당시 훼손되었던 창의문이 보수되고 초루草樓를 세웠기 때문이다. 본 작품을 그리던 시기는 1726년에서 1730년이므로 겸재가 진경을 그림에 있어 현장 사생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대개 겸재는 작품마다 제작시기를 기록하지 않는 편이지만, 본 작품은 마무리에 의의를 두고자 제작과 관련하여 짧게 글을 남겼다.
[참고도판]
1. 정선, <백운동>, 《장동팔경첩》, 조선, 33.1×29.5㎝, 종이에 수묵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관 6505)
2. 정선, <창의문>, 《장동팔경첩》, 조선, 33.1×29.5㎝, 종이에 수묵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관 6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