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출품작은 불상의 높이 34㎝, 전체높이는 43.5㎝의 금동여래입상으로 소형 불상 중 큰 편에 속하는 상이다. 광배光背는 결실되었으나 대좌臺座와 불입상이 온전히 전하는 작품이다. 상의 뒷면에는 주조시 생긴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불두佛頭와 불신佛身 부분에 뚫려 있다. 두 구멍 사이에는 광배를 고정하기 위한 촉이 달려있다.
머리는 육계肉髻를 표현하였고 나발螺髮의 표현은 없다. 얼굴은 큰 이목구비와 양감이 강조된 볼의 표현으로 풍만한 형태를 보인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고 가슴의 표현은 평판하며 신체는 율동감이 느껴지게 굴곡진 표현이 강조되었다. 수인手印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으로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어 정면을 향해 폈으며 왼손은 허리 높이로 아래를 향하고 정면으로 펴고 있다. 시무외여원인은 각각 시무외인과 여원인으로 두려운 마음을 없애주고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는 의미가 있는데 이른 시기 인도 불교조각에서부터 확인되는 것으로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자세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불두와 불신의 표현은 전체적으로 풍만하여 괴체감이 있게 조성되었다.
착의는 부견의覆肩衣와 대의大衣를 걸친 것으로 생각된다. 양 팔의 옷주름과 다리 위로 흘러내리는 옷주름 등은 비교적 깊은 각을 주어 조각되었으며, 가슴 위로 걸친 부견의와 다리 사이의 지그재그로 표현된 옷주름 등은 선각으로 표현되고 있다.
상의 얼굴표현과 불신의 괴체감, 착의법이나 옷주름 등의 표현은 통일신라(統一新羅, 676-935) 후기의 금동여래입상들과 비교된다. 본 작품은 강원도 홍천군에서 출토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불입상[비교도판1]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약사여래입상[비교도판2] 등과 유사하지만 상의 얼굴과 불신이 보다 비만화되었고 옷주름의 표현은 간략화되면서 선각 위주로 표현되고 있다.
대좌는 최하단 10각의 대좌받침 위 복련覆蓮과 앙련仰蓮의 원형 연화좌로 이루어져 있다. 대좌의 상판은 결실된 것으로 생각된다. 대좌의 형식은 경상북도 출토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여래입상[비교도판3]과 유사하게 표현되었다. [비교도판3]에 비해 복련의 연판은 크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강조되고 있으며 앙련의 연판은 다소 간략화되어 표현되었다.
본 작품과 같은 소형 불상은 이미 삼국시대(三國時代, B.C. 57-A.D. 660)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들 상의 조성 목적은 부모와 가족들을 위한 개인의 발원發願으로 조성된 원불願佛이거나 대형의 상을 만들기 전 모본이거나 반대로 대형 불상을 축소하여 조성하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들은 전각에 봉안되기도 했지만, 감실龕室이나 개인을 위한 원당願堂에 봉안되기도 했으며, 더불어 그 이동성으로 인해 불교미술의 도상이 전파되는데에도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1. 김주용, 「統一新羅 小金銅佛立像에 관한 一考察」,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9.
2. 김동하, 「新羅 統一期 小金銅佛像의 類型과 用途에 관한 試論 - 경주지역 발굴출토품 중심으로」, 『불교미술사학』18, 불교미술사학회, 2014.
[참고도판]
1. <금동불입상>, 통일신라, 전체높이 22.6㎝, 대좌높이 6.2㎝, 강원도 홍천군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 <금동약사여래입상>, 통일신라, 높이 3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 <금동불입상>, 통일신라, 전체높이 23.9㎝, 대좌높이 4.4㎝, 경상북도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