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회 마이아트옥션 경매

일시
2023-03-09 16:00
장소
마이아트옥션하우스
연락처
02-735-1110 / 9938
* 응찰은 프리뷰 기간 중 작품 상태를 모두 확인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 기타 자세한 공지사항은 하단 'NOTICE' 참조
확대보기
53
다산 정약용
남북학술설 : 이인행(李仁行, 1758-1833) 노형에게 상세보기
1822 ㅣ 비단에 먹, 종이에 먹
27×14.5㎝
추정가
KRW  
200,000,000 - 400,000,000
USD  
JPY  
작품문의
T. 02-735-1110 / 9938 F. 02-737-5527 M. myart@myartauction.com
작품설명
송이익위논남북학술설 送李翊衛論南北學術說      다산의 친필 서첩이다. 펼침면으로 앞뒤 16장 32면에 달하는 긴 글이다. 문집에는 누락되고 없다. 앞쪽의 7장은 치마폭을 잘라 만든 천에다 썼고, 뒤의 9장은 종이에 썼다. 병풍처럼 장첩하여 앞뒤로 썼다. 앞뒤로 두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는 따로 없다. 다산 특유의 날렵한 행서체로 쓴 후 정성을 들여 꾸민 아름다운 서첩이다. 첫 번째 글이 끝나는 곳에 다산의 인장 2과가 찍혀 있다. 주문인朱文印은 ‘정약용丁若鏞’이고, 백문인白文印 은 다산의 자인 ‘미보美甫’다. 두 번째 글의 끝에도 백문으로 ‘정약용인丁若鏞印’ 네 글자가 찍혀 있다. 주문인 외에 두 개의 인장은 이번에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서첩에는 모두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모두 이익위李翊衛에게 준 글이다. 익위翊衛라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일찍이 세자를 보위하는 세자익위사 世子翊衛司의 관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영남의 남인이었다. 이익위가 막상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글은 1822년에 썼다. 당시 다산은 61세였고, 이익위는 다산 보다 4살 위인 65세였다. 두 사람 모두 정조 서거 직후 정계에서 축출되어 오랜 세월 유배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익위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쑥 두릉의 여유당으로 다산을 찾아와 두 사람은 22년 만에 감격적인 재회를 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이 때 서울의 학문 풍조와 영남의 학술 경향에 대해 자못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내용을 보면 이익위 또한 다산의 경학 연구 방식에 상당한 불만이 있었던 듯 하다. 제목은 내용에 맞춰 새롭게 붙여 보았다. 이제 전체 글을 원문과 함께 읽어보겠다. 이익위李翊衛 노형은 나보다 네 살이 많다. 예전 나와 함께 태학에 노닐며 즐겨 양육하시는 교화에 목욕하고, 나란히 높은 벼슬의 자리에 올랐었다. 내가 유락流落하게 되자, 익위 또한 참소를 입고 귀양을 갔다. 이제 22년 뒤에 다시금 눈을 부비며 서로를 마주하고 보니, 비록 흰 머리로 꾀죄죄하여 서로 깜짝 놀랐지만, 기쁨이 다하자 눈물이 흘러 마음 둘 데를 알지 못하였다. 마침내 몇 조목의 생각을 써서 작별한 뒤의 볼거리로 삼으려 한다. 익위는 매번 북방의 학문이 넓지만 잡박함에 가깝고, 문채가 나도 꾸밈에 가까워 능히 폐단이 없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진실로 지당한 논의다. 마땅히 받아서 허물로 여겨, 힘써 스스로 바로잡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학문의 차이는 털 끝만 한데서 나뉜다. 공자는 큰 성인이신데도 사과四科 모두를 성문聖門에서 취하셨다. 하지만 고작 몇 차례 전해지자, 그 나누어진 갈래가 혹 연나라와 월나라의 거리만큼이나 멀어졌다. 학문이 어긋나기 쉽기가 이와 같다. 내가 영남의 학문을 보니, 또한 수백 년 사이에 능히 차이가 없을 수 없을 듯 하다. 위로는 선현을 받들지 아니하고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를 크게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예악은 문文에 가깝고, 성리는 질質에 가깝다. 넓지만 잡박함에 이르고, 문채가 나도 꾸밈에 이르게 된 것은 남방의 학문 또한 폐단이 없을 수 없다. 비록 남방의 선배라 하더라도 혹 그 기미氣味나 논설이 자기와 다르면 문득 배척하여 미워하는 생각을 품는다. 이런 것이 오래 쌓이고 점차 무젖어들어 저마다 들은 바만 높이는 까닭에 오늘날에 이르러 바람이 일어나고 물결이 솟구쳐도 능히 구할 수가 없다. 그 병의 뿌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성리에 대한 논의 또한 폐단이 없지 않다. 배우는 자로 하여금 높게 되기에만 힘을 쏟아 먼데서 끌어오고, 대단한 언변으로 기세를 부리게 하여, 심한 경우 훈고를 한 글이 근원에 이르지 못하고, 가리키는 뜻의 지취가 요령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러 장 이어진 글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세우기를 구하여, 이리저리 주어 모아 억지로 합쳐 놓고, 힘써 별 다르지도 않은 논의를 배척하곤 한다. 무릇 창의적인 견해를 담은 주장은 맞받아 쳐부수기에만 힘을 쏟아, 고루한 데서 스스로를 반성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대저 널리 인용한 증거들은 탐구함에 소략하여 공변된 이치에서 가르침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는 천하 만세의 일이지, 한 사람이나 한 집안의 사사로운 물건이 아니거늘, 어찌 제멋대로 단안하기를 이처럼 할 수 있는가? 『삼례주소三禮注疏』와 『좌전左傳』, 『국어國語』는 경전의 뜻을 펼쳐 보인 것이 몹시 많다. 『통전通典』과 『통지通志』, 『통고通考』와 『속고續考』는 예법을 정정訂定한 것이 매우 많다. 그런데도 대충 볼 뿐 찬찬히 검토하지 않는다. 북방의 유자들은 혹 옛 전적을 정밀하게 연구함을 마치 주자가 그랬던 것처럼 하니, 문득 이를 박잡하다고 병통으로 여긴다. 비록 다시 참 앎을 실천하여 모범으로 삼기에 족함이 있더라도, 그 낯빛을 살펴보면 우쭐대며 얕잡아 보는 뜻이 있다. 또 북방에는 도무지 방향을 아는 인사가 없다고 하면서, 또한 다시금 배운 것에 만 안주하여 감히 한 마디도 덧붙이지 못하면서 마침내 든 것도 없이 고상한 체하며 선배들을 우습게 본다. 안으로 실다운 행실을 엿보면 어질고 화목함은 앞사람에 미치지 못한다. 밖으로 화려한 문채文采를 살펴보아도 문식文識이 도리어 속유俗儒만도 못하다. 오직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 크게 여겨 더 보태려 들지 않고, 스스로 반성하려 들지 않는 법만은 지극히 굳세고 몹시도 확고하니, 날로 손상되면서도 깨닫지는 못함을 내가 알겠다. 이렇게 마구 쓰다 보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삼가 노형께서는 도량이 깊고 거짓에 너그러우시니, 어리석고 외람된 점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경계하여 일깨우는 말 같은 것은 성인께서도 택하신 바이다. 유柳나 조趙 등 여러 벗들과 서로 만나게 되거든 펼쳐 보여 의논하여, 한 목소리로 치우친 말을 거부하여도 괜찮겠다. 어떠한가. 임오년(1822) 국추菊秋, 열초洌樵가 쓴다.      李翊衛老兄, 長余四歲. 昔與余游太學, 咸沐樂育之化, 偕登優仕之籍. 及余 流落, 翊衛亦遭讒遷謫, 今於二十有二年之後, 乃復拭眼相對, 雖白首龍鍾, 兩相驚愕, 而喜極而涕, 不知所以爲心也. 遂書懷數條, 以共別後之觀. 翊衛每云, 北方之學, 博而近於雜, 文而近於縟. 不能無流弊. 斯固至當之論. 當受而爲過, 勉自矯救. 然學問之差, 分於毫忽. 孔子大聖也, 四科皆聖門之 所取也. 不過數傳, 其枝流所分, 或相燕越, 學問之易於差忒, 如是矣. 余觀嶺南之學, 亦恐不能無差於數百年之間. 不得以上戴先賢, 而自恃自大也 明矣. 禮樂近乎文, 性理近乎質. 及其博而至於雜, 文而至於縟, 斯則南方之 學, 亦未嘗無弊也. 雖於南方先輩, 或其氣味論說, 與己差殊, 輒生排軋之志, 積久漸漬, 各尊所聞, 故至於今日, 風起水涌, 莫之能救. 其病根在是. 性理之 論, 亦未嘗無弊. 使學者, 高騖遠引, 宏辯逞氣. 甚則詁訓章句之未達源委, 旨 義歸趣之未定要領. 而連章累牘, 求立其一偏之見, 萃牽合, 而力拒其小異之 論. 凡創見之說, 銳於迎擊, 而不思自反於孤陋. 凡廣引之證, 略於探究, 而不 念聽命於公理. 此是天下萬世之事, 非一人一家之私物, 豈容專斷如是耶. 三禮注疏左傳國語, 其可以發明經旨者甚多. 通典通志通考續考, 其可以訂定 禮法者甚多. 而略不津涉. 北方儒者, 有或硏精古籍, 如朱子之爲則, 輒病之 爲駁雜, 雖復眞知實踐, 有足模楷, 而觀其顔色, 有凌駕 易之意. 又緣北方, 都 無知方之士. 亦復安以受之, 不敢一言枝梧. 遂或空腹高心, 眇視前輩也. 內 窺實行, 而仁睦不及於前人. 外觀華采, 而文識反孫於俗儒. 唯其自恃自大, 不求益不自反之法, 至堅至確, 吾見其日損而不之悟也. 輸寫如此, 不勝悚仄之至, 伏惟老兄淵量寬假, 恕其愚濫. 若其箴 規之言, 聖 人所擇, 柳趙諸友, 如或相逢, 不妨披示以議, 其同聲拒詖也. 如何如何. 壬午 菊秋, 洌樵書.      詩書禮樂抱長終 시서와 예악을 안고 길이 마치리니 斯世何人此意同 이 세상서 그 누가 이 뜻을 같이할까. 老去神游三代上 늙어가매 마음은 삼대 위를 노닐어도 春來身在百花中 봄 오자 이 내 몸은 백화 중에 있다네. 獨行時頫澄心水 홀로 가며 이따금 맑은 강심 바라보고 小醉常逢拂面風 살풋 취해 얼굴 스치는 바람과 늘 만난다. 自是屈伸隨正命 이로부터 굽히고 폄 바른 명을 따르리니 未妨衰朽遂成翁 늙고 쇠해 마침내 늙은이 됨 상관 않네.      睡起池坳曳杖行 자다 일어 못가를 지팡이 짚고 거니니 竹攡雨歇淡煙橫 대울타리 비가 개어 엷은 안개 걸렸구나. 溪肥䞉有流花力 냇물이 불어나서 흐르는 꽃 힘이 있고 山靜明生搗藥聲 고요한 산 달이 뜨자 약 찧는 소리 들려. 沙上破村餘夕照 백사장 위 퇴락한 마을 저녁 볕이 남았는데 水邊古壩殿春耕 물가 옛 방죽에선 봄갈이를 서두른다. 幽棲自分蔥湯足 그윽한 거처 파 국이면 분수가 족하거니 誰識荒陬戀聖明 거친 변방 성명聖明을 그림 그 누가 알겠는가?      위 두 편의 시는 예전에 다산에 귀양 살면서 지은 것이다. 애오라지 다시 써주며 함께 감상코자 한다. 右二詩, 昔在茶山謫中作也. 聊復書呈, 以共一粲. 편당偏黨이 나뉘면 반드시 기이한 화가 있게 마련이다. 앞선 역사에서 드러난 것은 모두 생략하고, 시험 삼아 우리나라의 일만 논해보겠다. 동인과 서인이 나뉘자 기축년의 화가 일어났고, 남인과 북인이 갈리자, 북인은 마침내 큰 살육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노론과 소론이 나뉘고,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이 갈라서자, 죽이고 치는 계교를 베풀어 써서 밀치고 배척하여 떨치지 못하였다. 비록 근자의 일만 하더라도 갑진년과 갑인년의 격렬함은 참담한 화가 만연하였다. 앞선 자취가 이와 같음은 여러분도 모두 눈으로 보았고, 혹은 자신이 직접 걸려들기도 하였으니, 멀리 옛 일에서 찾을 것도 없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영남은 신라와 고려 이래로 어진 인재들이 나와 나라에서 정사를 맡았다. 조선에 이르러서는 큰 성씨들이 북쪽으로 옮겨와 대대로 국가의 운명을 지킨 것이 수십 여 집안이다. 현철賢哲한 인사들이 서로 이어지고 도맥道脉이 끊어지지 않아, 들어와 경상卿相이 되고 은택이 백성들에게까지 미쳤다. 하지만 당파에 얽매인 뒤부터는 떠돌고 소원해져서 조정을 오리나 기러기처럼 들락거리고, 이름과 지위가 현달하지 못해, 침학侵虐을 받아도 막아내지 못한 것이 이제 또 백여 년이나 된다. 그런데도 오히려 다시금 강학하며 경전을 연구하고, 붕우 간에 서로 도와 사양하고 권면하는 풍속이 도탑다. 공고하게 유지된 까닭은 무릇 이 때문이다. 대체 어쩌다가 문호가 갈라지고 각자 독립함을 표방하여, 졸졸새는 것을 막지 않아 솟구치는 물결이 산꼭대기 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말의 날카로움은 창보다 예리하고, 마음자리는 납가새나 명아주보다 험하다. 뜻을 같이 하는 자는 부추겨서 드넓은 길로 보내어 돕고,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밀쳐서 구렁텅이에 몸을 빠뜨린다. 헛것을 꾸미니 패금貝錦으로 글을 이루고, 기운을 부리자 화살과 돌멩이가 비 오듯 한다. 듣는 이가 하품하고 기지개 켜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논하는 자가 꾸짖어 물리치는 것도 생각지 않는다. 선배의 충후한 풍도는 잃어버리고, 시속時俗의 경박한 자태만 받아들인다. 주노邾魯의 고장이 갑자기 이렇게 변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다툼이 커질 수 없는데도 재앙은 이미 조짐이 보인다. 귀양과 유배가 서로 잇달아 기울고 무너짐이 쉼이 없다. 병장기를 각자 마음 속에 숨겨 놓고, 덫을 놓아 눈 앞에서도 살피지 못한다. 이제 마침 조야朝野에 일이 적은 까닭에 그 꾀하고 도모함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있지만, 만약 예전 인동仁同과 하동河東의 일과 같이 조금만 기댈 구석이 있게 되면 반드시 간사한 자가 있어, 남몰래 큰 옥사를 빚어내고야 말 것이다. 이는 서로 아끼는 자가 팔꿈치를 치는 효험을 받들고, 눈알을 뽑아 거는 근심을 금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 솟구쳐 부딪치는 연유를 들어보면 모두 젊은이들이 객기를 부려서 마침내 이에 이른 것이다. 만약 나이가 많은 덕 높은 이가 이들을 야단쳐서 금지시켜 감히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지 못하게 했다면 그 흐름이 어찌 마침내 여기까지 이르렀겠는가? 또 무릇 말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반드시 한편이 가만히 엎드리는 것이니, 그래야만 싸움을 해결할 이치가 있게 된다. 번번이 나는 옳고 저는 그르다면서 늘 자기는 펴고 남은 꺾으려 든다면 되겠는가? 내가 비록 백번 옳고 저가 비록 백번 그르다 해도, 서로 끊임없이 공격한다면 벌써 더러운 것과 결백한 것이 같아지고 만다. 진실로 한 사람의 덕 높은 선생이 있어 단 위로 올라가 깃발을 흔들고 꽹과리를 치면서, 좌차左次 즉 약한 쪽에게 감히 다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다시 이를 어긴다면 건괵巾幗, 즉 아녀자로 취급하기로 약속한다면 어지럽지 않게 되고, 열흘이나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반드시 갑옷을 벗고 창을 내던지며 전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이에 양쪽에서 각각 몇 사람이 함께 도산서원을 나란히 배알하고 향을 살라 맹서하여 감히 다시는 편 나누지 않겠다고 다짐하고는 향기로 가득 찬 마음을 다시금 가슴 속에 베풀어둔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양측 제현이 스스로를 아끼고 스스로를 근심함이 유독 곁에서 지켜 보는 자가 대신해서 이를 위해 마음 쓰는 것만 못하겠는가? 충고하는 말을 오히려 마땅히 살펴야 할 것이다. 임오년(1822) 10월 26일 익위 노형이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가므로, 작별에 임하여 이를 써서 노자로 준다. 열초가 쓴다.      偏黨之分, 必有奇禍. 前史所著, 並略之, 試論吾東. 東西分而己丑之禍作. 南 北分而北竟陷大. 老少論分, 淸濁南分, 而殺伐用張, 觝排不振, 雖以近事, 甲 辰甲寅之激, 而慘禍蔓延. 前轍如此, 賢皆目覩. 或身自橫離, 不必遠觀古事, 乃可悟也. 嶺南自新羅高麗以來, 英賢輩出, 爲政於國. 及至聖朝, 大姓北遷, 世執國命 者, 數十餘家. 賢哲相承, 道脉不絶, 入爲卿相, 澤及黎庶. 自黨錮以來, 畸旅 疏遠, 鳧雁於朝廷, 名位不達, 凌虐不禦者, 今且百有餘年, 猶復講學硏經, 朋 友相麗, 揖讓推 , 風俗敦厚, 所以維持鞏固者, 凡以是也. 不知何故, 分門割戶, 標榜各立, 涓涓不塞, 以至懷襄, 詞鋒銛於戈戟, 心界險 於蒺藜. 同者吹之, 送翼天衢, 異者擠之, 墜身坑坎. 搆虛則貝錦成章, 騁氣則 矢石如雨, 不顧聽者之欠伸, 不念論者之詆斥. 喪先輩忠厚之風, 投時俗澆薄 之態, 不意 魯之鄕, 猝變爲此, 訟不可長, 而禍已兆矣. 謫配相續, 傾頹不休. 弩牙各設于心上, 機擭不察于目前. 今適朝野少事, 故未及遂其計謀, 若有小憑據, 如向來仁同河東之事, 則必有 奸人, 竊發醞成大獄, 此相愛者之所以推其打臂之驗, 而不禁抉目之憂也. 聞 其所以磯激之由, 咸由少年等, 使其客氣, 遂至于此. 若使高年宿德, 呵止此 類, 令毋敢隨意亂動, 其流豈遂至此. 且凡息辭之法, 必一邊雌伏, 乃有解鬪之理. 每云我是而彼非, 常欲伸己而屈 人. 其有濟乎. 我雖百是, 彼雖百非, 卽其相攻擊不已, 已地醜潔齊矣. 誠有一 大德先生, 登壇麾旗鳴金, 以左次令無敢更進一步, 雖復遺之, 以巾 投之以約 矣, 則不撓焉. 不過旬月, 必解甲投戈, 羞前之爲矣. 於是兩邊各數人, 乎共謁 于陶山之院, 焚香設誓, 不復敢以畦畛. 芬懣之心, 再設于胸中, 不亦善乎. 兩 邊諸賢, 其自愛而自憂也. 獨不及於旁觀者之代爲之用心乎. 忠告之言, 尙宜 財察. 壬午十月卄六日. 翊衛老兄棄官南歸, 臨別書此以之. 洌樵書.      앞의 두 첩은 열상의 늙은 벗이 손수 쓴 글씨다. 경신년(1800)년에 정조 임금께서 서거하신 뒤, 세상의 재앙에 걸려 수십 년간 떠돌다가, 근래에야 비로소 살아 돌아왔으므로, 내가 지나다가 들러서 문안하였다. 인하여 북방의 선배들이 왕왕 배움은 박잡한데서 잃고, 문장은 신기新奇한 데서 병통이 있어, 선진先秦을 따르려 해도 마침내 명나라 유자들의 높고 기이한 자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해주었다. 또 당시에 어질다는 무리들이 입이나 귀로 세상을 속이는 행위를 낮추 보아, 이들과 나란히 서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정주程朱의 문자를 주소注疏의 글이라 여기고 뜻을 두려 하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말류라 능히 폐단이 없을 수 없다고 했다. 군자는 경전으로 돌아갈 뿐이다. 내가 바닷가에서 얻은 것은 한결같이 바른 데로 돌아감이니, 이것으로 후학들을 권면하여 이끈다면 몹시 다행이겠다. 다만 엮고 묶고 편집하는 작업에만 오로지 힘을 쏟는다면 오히려 제2의로 떨어짐을 면치 못할까 염려한다. 모름지기 원본을 향해 더욱 약約으로 돌아가는 공부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 서첩의 앞부분은 나무람을 해명하면서 경계로 삼을 바를 깃들인 것이다. 다만 거론한 바 『삼례주소』와『통전』『통지』 등의 말은 이미 본질을 버리고 말단에 힘쓰는 병통을 가리 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이것으로 주자가 한 것을 본받으려 한다면 주자를 앎이 얕은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러나 위로 선현을 추대하면서 스스로를 크게 여길 수는 없다고 말한 것은 진실로 절실한 가르침이니, 실로 패복하는 바가 있다. 후단은 근일 영남에서 같은 집안끼리 싸우는 것을 상심하여, 계교하지 말고 가만히 있게 하려 한 것이다. 이는 실로 내가 일찍이 아는 벗들에게 여러 번 되풀이해서 타일렀던 것이다. 천리의 밖에서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같이 하니, 서로 더불어 더욱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右二帖, 洌上老友手墨也. 庚申哭弓後, 罹世禍, 流落數十年. 近始生還, 余過 而問焉. 因說北方前輩, 往往學而失於博雜, 文而病於新奇, 欲追先秦, 而卒 未脫明儒嶢畸之塗轍, 低視時賢輩口耳欺世之爲, 而羞與之比, 至以程朱文 字, 爲注疏之文, 而不屑留意, 此末流所以不能無弊也. 君子反經而已. 吾人 海上所得, 一反諸正, 以是 率後學, 幸甚. 但恐專精於纂輯編摩之役, 猶未免 落在第二義. 須向原本, 益懋反約之工, 此帖前段, 卽其解嘲而規戒寓焉. 第 其所擧三禮注疏通典通志等語, 已難掩舍本騖末之病根. 而以是爲欲效朱子 之爲, 則不幾於淺之知朱子乎. 然其言不可以上戴先賢, 而自大, 則誠切至之 規箴. 固在所佩服也. 後段則傷近日嶺下同室之鬪, 欲其勿較雌伏, 此實區區 所嘗諄複於知友者, 千里之外, 不約而同, 可不相與加勉哉.      22년 만에 반갑게 해후한 두 사람은 지난 이야기를 나누며 감회에 젖었다가. 대화가 북방과 남방의 학술 태도에 대한 문제로 번졌다. 이익위는 북방 즉 서울의 학문하는 태도에 대해 공부가 너무 잡박하고, 문장도 꾸밈이 많아 문제라는 취지로 비판했다. 그러자 다산은 한편 이를 수긍하면서, 반대로 영남의 학문 또한 폐단이 적지 않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다산의 눈에 비친 영남 학계의 폐단은 이러했다. 이익위가 북방 학계의 폐단으로 지적한 점은 영남 학계에도 같이 적용된다. 우선 영남 학자들은 선현을 우습게 보고, 자신들만이 최고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영남의 선배에 대해서도 자신과 생각이 조금만 다르면 거침없이 배척한다. 성리학에 관한 논의만 해도 그렇다. 젠 체하며 큰 소리 치는 것이 버릇이 되었지만, 막상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핵심을 찌르지도 못하고 요령도 얻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어거지로 자기 견해를 세워놓고, 상대방을 비방하지만 막상 둘의 주장을 되짚어 보면 서로 다를 것도 없다. 새로운 주장은 극력 배척하고, 스스로 고루함에 빠진 줄은 깨닫지 못한다. 이리저리 증거를 들이대며 주장을 펼쳐도 상식 수준에서 생각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사서오경 외에 다른 역대의 전적들은 아예 들춰볼 생각도 않는다. 이에 반해 북방의 학자들은 이들 옛 전적도 꼼꼼히 연구하는데, 이를 박잡하다고 나무라면서 얕잡아 보며 우쭐대는 태도를 보인다. 막상 자신들은 배운 것에 안주할 뿐 한마디도 제 목소리를 낼 줄 모른다. 그러면서도 더없이 고상한 체 선배들을 우습게 보니 한심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행실은 앞 사람에 못 미치고, 문장의 식견도 속유俗儒만 못하다. 그러니 무슨 학문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산은 이렇듯 자못 신랄하게 영남 학자들의 융통성 없고 고루한 학문 자세를 질타했다. 다산은 다른 글에서 이를 두고 ‘안동 답답安東沓沓’이란 말로 표현한 적도 있다. 글 끝에서 다산은 자신의 이 글을 유柳와 조趙 같은 영남 학자들과 함께 돌려 보며 검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어 강진 유배 시절에 지은 7언율시 2수를 적었다. 종이에 쓴 두 번째 글은 당쟁의 폐해와 영남의 집안 간 분란에 대해 적은 글이다. 역시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는 이익위에게 전별 선물로 써준다고 했다. 당파 싸움은 반드시 기이한 재앙을 불러온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중국 역사에서 근거를 찾는 것은 그만두고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우다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섰다. 서인은 또 노론과 소론으로 쪼개졌다. 남인도 청남과 탁남으로 나뉘었다. 그때마다 나라에는 참혹한 재앙이 일어나곤 했다. 영남 학자들이 신라 고려 때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대대로 국가의 원훈으로 큰 업적을 세운 집안이 많았는데, 당파가 생겨나고부터는 부침이 심해져서 가늠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온통 동당벌이同黨伐異의 싸움질만 일삼아 경박하기 짝이 없는 행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모두 젊은이들이 객기를 참지 못해 생긴 일이다. 다산은 이러한 폐단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저만 옳고 남은 그르다는 편협한 태도를 버리고 서로 물러나 양보하여 양측의 대표 몇 사람이 도산서원으로 가서 퇴계 선생의 위패 앞에서 다시는 다투지 않기로 맹세할 것을 제안 했다. 서첩의 맨 뒤에는 이익위가 쓴 발문이 남아있다. 이익위는 다산의 경학 공부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듯하다. 경전과 정주程朱 문자에 기초하지 않고, 자꾸 『삼례주소』니 『통전』이니 『통지』니 하는 잡다한 책까지 끌어들여 편집하고 정리하는 작업만 한다면 이것은 제 2의로 떨어지는 것이라, 군자의 박이약지博而約之 하는 공부에서 멀어지지 않겠느냐고 염려했다. 말하자면 그런 작업은 바탕 공부에는 보탬이 없고. 단지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니냐고 지적한 것이다. 그는 다산이 두 서첩에서 영남의 학술 폐단을 통렬하게 비판한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다산의 잡박한 병통을 다시 한번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이어진 글들을 읽어보면 영남 학계에 대한 다산의 시선과, 서울 학계에 대한 영남 학계의 시각이 비교적 선명하게 교차된다. 22년만의 해후에서도 이렇 듯 예봉을 날카롭게 세운 토론이 오가고, 이것을 글로 남기며, 또 그 비판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 깊다. 다산의 이러한 주장은 이 글을 통해 처음 소개되는 것이어서, 앞으로 그 내용을 두고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정민, 『眼目과 眼福』(공화랑, 2009), pp. 129-133 발췌. 
Condition
 
추천작품
top

현재 진행중인 경매가 없습니다.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