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초상화는 외형을 닮게 하는 것을 넘어 인물의 정신까지 담는다는 뜻으로
전신사조傳神寫照로 일컬어졌다. 본 출품작은 강세황이 직접 그린 자화상으로
탕건宕巾과 간단한 몇 개의 필선으로 구성된 의복을 입은 것과 달리 얼굴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그간 알려진 편년작 중 이명기(李命基, 1756-?)가 그린
71세때의 초상에 비해 홀쭉해진 볼이나 피부의 표현 등을 봤을 때 가장 늦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 말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조씨삼형제
초상趙氏三兄弟肖像>과 음영의 표현이 유사한 점 역시 이 작품이 79세까지 산
강세황의 말년에 그려진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근래에 상당히 건강하여 조금도 병이 없고 간혹 거문고와 노래로 긴긴 해를 보내고
있다”고 할 만큼 건강하였다고 전하며, 죽기 직전 “푸른 소나무는 늙지 않고 학과
사슴이 일제히 운다蒼松不老, 鶴鹿齊鳴”라는 글을 남길 정도로 기개가 뛰어났다고
한다. 강세황의 고아한 정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자화상의 정수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