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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회 마이아트옥션 메이저 경매 LOT.052 한범제 소장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2022.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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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회 마이아트옥션 메이저 경매 출품작

 

LOT. 052 누숙경직도 樓璹耕織圖

Farming and Weaving Painting

 

첩 / Scrapbook(52면)

종이에 수묵담채 / Ink and Color on Paper 35.5×25.7㎝

 

₩ 500,000,000-1,000,000,000

 

누숙경직도_1.jpg 

 

 

 

 

숙종 연간 문인 한범제韓范齊가 소장한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김영진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유순영 | 목원대학교 미술교육과 강사

 

  <누숙경직도>는 남송 때 절강성 임안부臨安府 오잠현於潛縣의 현령을 지낸 누숙 (樓璹, 1090-1162)이 농사와 잠직蠶織의 실정을 경도耕圖 21면과 직도織圖 24면으로 그리고, 각각에 시를 더해 고종에게 헌상한 작품이다. 누숙은 소흥3년(1133)에 오잠현령於潛縣令으로 부임했다가 소흥5년(1135)에 소주통판邵州通判에 임명되었기에 <누숙경직도>의 원 제작 시기는 1133-1135년 사이로 추정된다. <누숙경직도>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누숙의 조카 누약(樓鑰, 1137-1213)이 참지정사參知政事라는 고위직을 지내면서 백부伯父의 <경직도>를 선양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이러한 작업에는 누약 외에도 누숙의 손자 누홍樓洪 등도 참여하였다. 1210년 누홍과 누심樓深은 「누숙경직도시樓璹耕織圖詩」를 새긴 석비를 제작했으며, 이때 누약과 누홍의 「경직도후서耕織圖後序」가 지어졌다. 1210-1213년에 누약이 <누숙경직도>를 모사한 회권繪卷 두 점을 제작하여 황태자에게 진상하면서 동궁東宮을 교육하는 감계용 회화로 활용되었다. 1237년에는 왕강汪綱이 처음으로 목판본을 만들었으며, 누약의 장손 누표樓杓가 발문을 쓴 뒤에 이종理宗 황제에게 진상되었다. 남송대에는 회본繪本, 석각비, 목판본 등 여러 형식으로  <누숙경직도>가 제작되었으며, 『시경』 「빈풍豳風」 편을 그린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와 『서경書經』 「무일無逸」편을 도해한 <무일도無逸圖>와 함께 민본주의에 바탕을 둔 궁중 감계화鑑戒畵로 기능하였다.

 

  원대에는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에 의해 모본이 제작되고, 농서에 활용되는 등 농업정책과 관련된 교본으로 전파되었다. 명대에는 <누숙경직도>의 실용적인 가치가 점차 사라지고 전통적인 남경여직男耕女織을 나타내는 이상적인 도상으로 인식되면서 세부표현과 배경에도 변화를 보였다. 청대에는 강희제의 명에 의해 1696년에 <누숙경직도>에 근거하여 서양화법까지 구사된 <패문재경직도> 목판 본과 화첩이 제작되었으며, 황제의 이상적인 치국 이념을 구현하는 수단으로 활용 되었다.

 

  조선에 <누숙경직도>가 들어온 것은 성현(成俔, 1439-1504)의 『허백당집虛 白堂集』 「봉교경직도후서奉敎耕織圖後序」에서 처음 확인된다. 그는 “무오년 (1498), 연산군 4년에 정조사正朝使 권경우(權景佑, 1448-1501)가 북경에서 돌아와 <누숙경직도> 1질을 성상聖上(연산군燕山君)께 바쳤는데, 가는 붓으로 그려 낸 솜씨가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성상께서 화공에게 명하여 그 필적을 그려내고 채색을 입히게 하였으며, 임사홍(任士洪, 1445-1505)에게 서시序詩를 쓰게 하여 드나들 때 보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으셨다”고 하였다. 이글은 성현이 대제학으 로 재임하던 1500년(연산군 6) 무렵의 글로, 권경우가 입수해 온 경직도는 아마도 1462년 명나라의 송종로宋宗魯가 간행한 본이었으리라 추정된다.

 

  한편 중종中宗은 1511년에 그림과 시문詩文만 실려 있는 <경직도>가 감상하기에 불편하다며 병풍 세 벌을 만들 것을 명하여 이 시기에 병풍으로도 그려졌음이 확인된다. 명종은 즉위한 해인 1545년에 침궁寢宮에 항상 효자도孝子圖·경직도 耕織圖·계언병戒言屛 등을 설치해 놓고 경계로 삼는다고 하여 <누숙경직도> 병풍이 왕실에서 감계적인 기능을 수행했음을 알려준다. 앞서 성현의 자료 외에 또 주목되는 것은 1518년에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1492)의 제자인 눌옹 송석충(訥翁 宋碩忠, 1454-1524)이 명나라 송종로본에 실린 예서체로 된 「왕증우경직도기王增祐耕織圖記」를 감상한 기록이다.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에 실린 <「전등여화」 발문과 「경직도기」에 팔분 서체로 적다[剪燈餘話跋 耕織圖 記 八分書識]> (1518년, 중종 13)가 그것이다. 궁중에서 감계용으로 쓰이던 <경직도>가 이제 사대부들에게도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고, 또 명판 송 종로본의 유통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제자인 임연재 배삼익(臨淵齋 裵三益, 1534-1588) 또한 경직도를 소장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학진흥원 소장 <외암비장畏巖秘藏> 내內 도서류圖書類) 명판 송종로본은 임진왜란 이전 조선에서도 간행, 유통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다. 현재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 유일본으로 조선 목판본이 소장되어 있을 뿐이다. 이상으로 보건대 명판본 경직도가 조선 전기에 유입된 직 후 족자, 병풍, 화첩, 목판 등으로 다양한 형태로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목판본은 일본 「연보병진延寶丙辰」, 1676년 화각본和刻本의 출현에도 영향을 주었다.

 

  <경직도>는 조선 후기에도 계속 제작되어 필사본 화첩과 병풍의 형태로 유통되었다. 궁중에서의 사례로는 영조, 효명세자 등이 제작, 수용하였음이 확인되고, 사대부들에게는 주로 지방관으로 나아가 목민관으로서의 자세, 백성의 농잠 교본용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18세기 윤심위(尹心緯, 1716- ?)는 단병短屛으로, 19세기 박규수(朴珪壽, 1807-1877)는 두루마리로, 20세기 초 권동수(權東壽, 1842-?)는 12폭 병풍으로 제작, 감상하였다.

 

  한범제(韓范齊, 1634-1695)의 수장인이 있는 본 <누숙경직도>는 숙종연간에 제작된 채색 화첩으로, 서문과 함께 경도耕圖 21면과 직도織圖 24면이 온전하게 수록된 작품이다. 근래 장황된 첩의 표지에는 평산 신씨 석농石農이라는 제첨題簽이 있으며, 서문인 「경직도기耕織圖記」가 5면에 걸쳐 쓰여 있다. 서문의 첫 면 아래에는 ‘서원西原’, ‘한범제인韓范齊印’, ‘일지一之’ 등 3과의 인장이 수직으로 찍혀 있다. 한범제는 본관이 청주淸州, 자字가 일지一之로 숙종연간(1674-1720) 에 활동한 인물이다. 조부는 한협韓協, 부친은 한수기韓壽琦이며, 큰아버지 한치량韓致良에게 입양되었고 1675년(숙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내직으로 전적典籍‧지평持平‧장령掌令‧헌납獻納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 무안현감 (1680-83년), 정산 현감(1686년), 임천 군수(1688-89년), 영해 부사(1694-95년) 등을 지냈다. 한범제의 몰년이 1695년이므로, 그 이전에 제작된 작품으로 확인된다. 사대부의 경우 경직도의 수장과 활용이 대부분 지방관 재직 시기인 점을 고 려하면 위의 무안, 임천 등에서 제작, 소장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범제의 생애와 관련된 묘도문자는 현재 발견된 것이 없으며 김진규金鎭圭가 지은 「한영해 【범제】만韓寧海【范齊】挽」(『죽천집竹泉集』 권4)이 생애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범제는 이사명(李師命, 1647-1689)의 가까운 친척으로 벗이자 사제 지간이었다. 이 때문에 기사환국으로 이사명이 사사되었을 때 그와 가깝다는 이유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서문인 「경직도기」는 앞부분의 2/3 가량이 명나라 송종로본에 실린 「왕증우경직도기」1462년을 옮겨 쓴 것이고, 뒷부분은 누약의 「발양주백부경직도跋揚州伯父耕織圖」의 후반부 내용이 합성되어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누숙경직도_2.JPG

 

「경직도기耕織圖記」

圖畫有關於世敎, 足以垂訓後人者, 是不可不傳也. 故士君子著之以示人, 豈但留 【適】情於玩好哉? 蓋欲使人覽之, 有以感慕而興起, 其於治化, 有所輔也. 江西按 察僉事宋公宗魯耕織圖一卷, 可以【謂】有關於世敎者矣. 圖迺宋參知政事樓鑰伯 父壽玉所作, 每圖詠之以詩. 歷世旣久, 舊本殘缺, 宋公重加考證, 壽諸梓以傳, 屬 予記其事. 予觀圖中農夫, 自耕焉而種, 種焉而耘, 耘焉而獲, 獲焉而舂, 田野之內, 無所【少의 誤寫】休息, 歷數月而後得粟. 蠶婦自浴焉而食, 食焉而繭, 繭焉而繅, 繅焉而織, 閨房之內, 廢寢忘湌, 夫歷數月而後得帛. 

  그림은 세교世敎와 관계가 있어 족히 후대 사람에게 교훈을 끼칠 만한 것이 있으니, 이것이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군자士君子가 지어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니 어찌 다만 완호玩好하는 데에 뜻을 두었겠는가? 사람으로 하여금 보아서 느끼고 흠모하여 흥기하게 하고자 해서이니, 다스리고 교화함에 보탬이 되는 바가 있다. 강서 안찰첨사江西 按察僉事 송공宋公 종로 宗魯가 판각한 <경직도耕織圖> 한 권은 세교와 관계가 있다고 할 만하다. 그림은 송宋나라 참지정사參知政事 누약樓鑰의 백부인 누수옥樓壽玉이 그린 것으로 그림마다 시로 읊었다. 세상에 유통된 지 오래 되어 구본舊本이 이미 결락되었기에 송공이 거듭 고증을 가하여 목판으로 새겨 전파 하고자 하였고 내게 부탁하여 그 일을 기록하게 하였다.

 

  내가 보니, 그림 속의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매고 수확하고 곡식을 빻으면서 들판에서 조금도 쉬지 못하는데, 몇 달이 걸린 뒤에야 곡식을 얻는다. 누에치는 아낙은 어린 누에를 씻겨 뽕잎을 먹여서 누에로 성장시키고 고치로 실을 뽑아내서 비단을 짜느라 규방 안에서 잠자고 밥 먹는 일도 하지 못하는데, 무릇 또한 몇 달이 걸린 뒤에야 비단을 얻는다. 

 

其男婦辛勤勞苦之狀, 備見於楮墨之間. 使居上者觀之, 則【知 누락】稼穡之艱 難, 必思節用而不殫其財, 時使而不奪其力, 淸儉寡欲之心, 油然而生, 富貴奢侈之 心【念의 오사】, 可以因之而懲創矣. 在下者觀之, 則知農桑爲衣食之本, 可以裕 於身而足於家, 必思盡力於所事而不辭其勞, 去【其 누락】放僻奢侈之爲而安於 仰事俯育之樂矣.

  사내와 아낙네가 애쓰고 고생하는 모습을 종이와 먹물 사이에서 두루 볼 수 있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이를 보도록 한다면 파종하고 수확하는 것이 어렵기에 반드시 절약하기를 생각하여 그 재물을 다 써 버리지 않고 때맞게 부려서 그 노동력을 빼앗지 않 을 터이니, 청렴하고 검소하여 탐내지 않는 마음이 크게 일어나고, 부귀를 추구하고 사치를 부릴 생각을 이로 인하여 징계할 수 있으리라.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이를 보도록 한다면 농사와 양잠이 의식衣食의 근본인지라 자신을 넉넉하게 하고 집안을 풍족하게 할 수 있음을 알아서, 반드시 일하는 바에 힘을 다할 생각을 하여 그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을 터이니, 제멋대로 굴며 사치하는 행동을 근절하고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보살피는 즐거움에 편안해 할 것이다. 

 

民生二圖之詳, 勞非敢憚, 又必無兵革力役以奪其時, 無汙吏暴胥以肆其毒. 人事 旣盡, 而天時不可必, 旱潦螟, 旣有以害吾農夫, 桑遇雨而葉不可食, 蠶有變而壞於 垂成, 此實斯民之困苦, 上之人尤不可以不知. 此又圖之所不能述也 伯父諱璹字 壽玉 一字國器 官至朝議大夫 嘉靖【定의 오사】 三年八月朔從子正奉大夫參 知政事兼太子賔客奉化郡開國公食邑三千一百户食宲封六百戶樓鑰謹書.

  백성들의 생계는 두 그림에 자세하니 이는 수고로움을 감히 꺼릴 바가 아니다. 또 반드시 전쟁이나 부역으로 농사철을 빼앗지 말고 탐관이나 혹리가 악독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사람이 할 일을 다 했다고 하더라도 천시天時를 기필할 수는 없다. 가뭄, 수재, 해충 따위가 우리 농부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일어났다면 뽕나무가 비를 맞아 잎을 먹을 수 없어져서 누에에 변고가 생겨 다 되어 가던 일을 망치게 된다. 이것이 실로 백성들의 고달픔이니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욱 알지 못해서는 안 된다. 이는 또한 그림으로는 기술할 수 없는 점이다. 백부伯父의 휘諱는 숙璹이고 자字가 수옥壽玉이며 또 다른 자는 국기國器이며 벼슬은 조의대부朝議大夫에 이르셨다. 가정嘉定 3년 8월 초하루에 종자從子 정봉대부正奉大夫 참지정사 겸 태자빈객參知政事兼太子賓客 봉화군 개국공奉化郡 開國公 식읍食邑 삼천백호三千一百户 식실봉食實封 육백호 六百戶 누약이 삼가 쓰다.

 

이와 같은 명明 왕증우王增祐와 송 누약 글의 조합은 일본 아쓰기시厚木市 향토자료관에 소장된 <누숙경직도> 화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약의 글을 인용한 뒷부분에는 송의 연호인 가정嘉定이 명의 연호인 嘉靖으로 오사되어 있다. 이 화 첩의 바탕이 된 아쓰기시 회본繪本 같은 이전 시기의 모본에서 비롯된 오류이거나 또는 이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로 생각된다. 서문 뒤에는 조선 중기 수묵사의水墨寫意 화풍으로 그려진 매조도梅鳥圖 한 점이 수록되어 있다.

 

농사와 잠직을 주제로 한 45면의 그림은 상단에 누숙의 시와 하단에 그림이 실린 상문하도上文下圖 형식이다. <경직도>는 크게 농사를 짓는 모습을 담은 ‘경작도耕作圖’와 누에치는 모습을 담은 ‘잠직도蠶織圖’로 대별되며 ‘경작도’ 21 장면과 ‘잠직도’ 24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작도에 그려진 장면은 1. 씨 불리기[浸種]‚ 2. 논 갈기[耕]‚ 3. 거친 써래질[耙耨]‚ 4. 고운 써래질[耖] ‚ 5. 고무레질[碌碡]‚ 6. 씨 뿌리기[布秧]‚ 7. 거름 주기[淤陰]‚ 8. 모 찌기[拔秧]‚ 9. 모 심기[揷秧]‚ 10. 초벌 김매기[一耘]‚ 11. 두벌 김매기[二耘]‚ 12. 세벌 김매기[三 耘]‚ 13. 물대기[灌漑]‚ 14. 벼 베기[收刈]‚ 15. 볏단 쌓기[登場]‚ 16. 도리깨질[持 穗]‚ 17. 벼 까부르기[箕場] 18. 맷돌 갈기[礱]‚ 19. 방아 찧기[憃碓]‚ 20. 채 거르기 [籭]‚ 21. 창고 들이기[入倉]이며‚

 

잠직도에 그려진 장면은 1. 「누에 씻기[浴蠶]」, 2. 누에 내리기[下蠶], 3. 누에 먹이기[餵蠶], 4. 첫잠[一眠], 5. 두잠[二眠], 6. 석잠 [三眠], 7. 잠에서 깬 누에[大起], 8. 채반 갈아주기[分箔], 9. 뽕 따기[採桑], 10. 막 밥[捉績], 11. 누에 올리기[上簇], 12. 채반 덥히기[炙箔], 13. 누에 내리기[下簇], 14. 고치 고르기[擇繭], 15. 고치 움[窖繭], 16. 실 뽑기[繅絲], 17. 누에 나비[蠶 蛾], 18. 누에 제사[祀祝謝], 19. 실 켜기[絡絲], 20. 비단 짜기[經], 21. 물레질[緯], 22. 길람[織], 23. 수놓기[攀花], 24. 마름질[翦帛]이다. 여기에 실린 시는 송 누숙이 지은 것으로 각 그림마다 1편의 시가 첨부되어 있다. 경작도 제 1수인 「씨 불리 기[浸種]」와 잠직도 제 1수인 「누에 씻기[浴蠶]」만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씨 불리기[浸種]」

溪頭夜雨足  시냇가에 밤비가 넉넉히 내렸으니

門外春水生  문밖에 봄물이 불어났네.

筠籃浸淺碧  대나무 바구니는 옅은 푸른빛이 들고

嘉穀抽新萌  아름다운 곡식에는 새싹이 돋아나네.

西疇將有事  서쪽 밭에 장차 할 일이 있으려니

耒耟隨晨興  농기구 가지고 새벽에 일어나네.

隻雞祭句芒  한 마리 닭으로 구망씨에게 제사 지내

再拜祈秋成  두 번 절 올려 가을 풍년을 기원하네.

 

*구망씨句芒氏: 오행五行 중에 목木의 운運을 맡은 신神으로, 봄을 관장한다.

 

「누에 씻기[浴蠶]」 

農桑將有事  논과 뽕밭에 일이 있으려니

時節過禁烟  절기가 한식寒食을 지났네.

輕風歸燕日  가벼운 바람에 제비 돌아오는 시절이요

小雨浴蠶天  잠깐 내리는 비에 누에를 씻길 때라네.

靑衫捲縞袂  푸른 적삼 하얀 소매 걷어 올리고

盆池弄淸泉  동이 파묻은 연못에서 맑은 샘물을 희롱하네.

深宮想齋戒  깊은 궁궐에서 재계하기를 생각하여

躬桑率民先  백성들에 솔선해서 몸소 뽕잎 따네.

 

 

  한범제 소장본에서 시를 쓴 서체는 서문의 서체와 동일하여 글씨는 한 사람이 쓴 것 으로 보인다. 그림의 순서는 원 상태를 잘 따르고 있으나 잠직도의 7, 8, 9면이 8, 9, 7 면 순으로 놓인 것은 새로 장황하는 과정에서 차례가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현전하는 조선본 <누숙경직도>는 좌도우문左圖右文과 상문하도 형식이 있는데, 전자에는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목판본과 아쓰기시 향토자료관본이, 후자에는 국립중앙박물관본이 해당된다(도판 1-3). 좌도우문은 고식古式의 회권繪卷 <누숙경직도>에서 파생된 선행하는 형식이며, 상문하도는 <누숙경직도> 삽도를 인용한 『편민도찬便民圖纂』 같은 명대 출판물과 관련 있는 후대에 선호된 형식이다. 1697년 조선에 전래된 <패문 재경직도> 역시 상문하도 형식이지만 화면 상단에 제목을 표기하고 시를 쓴 것과 그림의 내용은 아쓰기본厚木本 같은 작품을 모본으로 하여 화면 형식에 변화를 준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아쓰기본과 서문의 조합이 동일하고, 도상 표현이 유사한 것은 명대 송종로본을 따르는 동경 국립박물관 소장 조선 목판본과 아쓰기본 가운데 후자와 관련이 깊음을 말해 준다. 또한 현재 30면이 전하는 국립중앙박물관본과 동일한 화면 형식을 공유하고 있다. 

 

 

누숙경직도_3_1.jpg

 

  한범제 소장 <누숙경직도>를 현전 작품과 비교해 보면, <삼운三耘>에서 확인되듯이 아쓰기본이 산수와 인물 묘사에서 뛰어난 필치를 보여 준다. 국박본은 아쓰기본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필력이 떨어지며, 한범제 소장본은 두 작품에 보이던 왼쪽 상단의 대나무가 생략된 반면 하단에 토파土坡를 배치하여 안정된 화면구성을 보인다. 인물들이 쥐고 있는 접선摺扇, 쥘부채은 간략하게 그리고 채색을 가미하여 변화를 주었다.

 

 

누숙경직도_4_1.jpg

 

  잠직 장면을 보면, 동경 국박 소장 조선 목판본과 아쓰기본에서는 가옥의 지붕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으나 한범제본과 국박본은 지붕이 생략되거나 간략하게 표현하고 상운祥雲을 그려 장식하였다[도 4-6]. 지붕을 생략하는 화면 구도 역시 명대 판본에 보이는 후대적인 요소이다. 한범제본 <일면一眠>도 5-6에서는 여성의 얼굴 묘사와 머리 장식 표현이 국박본에 비해 간략 한 면모를 보이고, 구름과 수석 분재의 세부표현과 채색에도 변화가 있다. 

  한범제 소장본은 서문의 인장을 통해 제작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숙종 연간인 1695년 이전에 제작된 <누숙경직도>의 유형 을 보여 주는 화첩으로, 아쓰기본을 따르면서 상문하도 형식을 띠는 작품이다. <누숙경직도>가 민간에서 제작되고 감상된 사례로서, 현전하는 작품들이 온전 하게 전하지 않는 상태에서 서문과 함께 45면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다(일본 동경 국박본: 직도 22면, 아쓰기본: 경도 19면, 직도 20면, 국박본: 경도 12면, 직도 18면). 가장 근접하는 국박본에서 결실된 장면들을 살필 수 있으며, 현전 작품들과의 관계를 검토함으로써 조선시대 <누숙경직도> 의 제작 일면을 파악할 수 있다.

 

 

  아쓰기본의 경우 앞서 말했듯이 명 왕증우와 송 누약의 글이 조합된 채 초서로 쓰여 있고, 끝에 ‘독성자獨醒子’, ‘도명피속逃名避俗’이란 인장이 찍혀 있다고 한다. 이 인장들을 한장인閑章印으로 볼 수 있겠으나, 혹 ‘독성자’란 호를 썼던 강석규(姜錫 圭, 1628-1695)의 필사일 가능성을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왕증우의 글과 누약의 글의 조합은 이 필사자가 저본으로 택했던 자료에 애초 1장의 결락이 있었기에 이런 조합의 필사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이후 다시 이 독성자 필사본이 전사轉寫되면서 이 오류가 계속 답습되었을 것이다. 한범제와 강석규의 연결고리는 동시기 서인西人 이라는 점, 남구만南九萬이 매개가 되어 있다는 점(남구만이 함경감사 시절 강석규가 고산 찰방, 한범제의 벗 이사명은 남구만과 가까운 사이) 등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한범제의 동서인 박성석朴星錫의 외손자가 윤심위라는 점이다. 윤심위는 윤봉구尹鳳九의 아들로 임천 군수 시절 <경직도> 단병短屛을 제작, 소장하고 있었다.(「가질임천 수경직도발家侄林川守耕織圖跋」, 『석문집石門集』 권6)

 

 

  한범제 소장본의 마지막에는 김득신金得臣, 권겹權韐, 정창주鄭昌胄, 정희량鄭希亮, 권상하權尙夏, 나식羅湜 등의 시가 필사되어 있는데, 이 시들은 경직도와는 무관하고 끝장의 이면 여백지를 활용하여 유명 한 시 몇 수를 옮긴 것이다.

 

 

누숙경직도_5.JPG

 

 

[참고문헌]

정병모, 「조선시대 후반기의 경직도」, 『미술사학연구』 192, 한국미술사학회, 1991.

김순아, 「조선시대 경직도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이수진, 「조선시대 경직도의 수용과 확산」, 대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李梅, 「조선시대 中國 耕織圖의 유입과 수용 양상」,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22. 

송민수, 「조선시대 왕실 경직도류회화 제작: 佩文齋耕織圖를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22. 

渡部武, 「明·宋宗魯本『耕織図』の書誌學的考察」, 『東海大學紀要文學部』 8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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