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방文房’은 조선시대 영·정조대의 문예부흥 분위기가 확산되며 널리 유행하였다. 문방구에 대한 관심을 여러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규장각의 일기인『내각일력內閣日曆』을 살펴보면 정조연간 화원들의 시험을 볼 때 ‘문방’을 주제로 시험문제를 내기도 할 정도였다. 왕실 뿐만 아니라 당시를 대표 문인인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이 세시풍습을 서술한『경도잡지京都雜誌』나 실학자인 서유구(徐有?, 1764-1845)의『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에도 문방의 항목이 별도로 있어 이 시기 왕실과 사대부 모두 문방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필통은 사대부의 서재에 꼭 필요한 문방기물 중 하나로, 정조가 좋아하여 궁중회화로 많이 그려졌던 책가도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물이기도 하다. 필통은 일상품이자 동시에 완상용으로, 18세기 문예부흥, 문방에 대한 열망 속 나무·금속 등 다양한 재질로 제작되었다. 특히 18세기 후반 이래 백자의 수요층이 확대되면서 필통이 백자로도 제작되기 시작했다. 백자로 제작된 필통의 형태는 원통형, 각형 등이 있으며 그 외면에 청화로 문양을 그리거나 투각 혹은 양각기법으로 여러 가지 문양을 장식하였다.
본 출품작은 1992년 덕원미술관에서 펴낸『朝鮮時代陶磁名品圖錄』에 출품된 필통으로, 사각형에 동일 문양 장식의 필통이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백자제필통은 일반적으로 원통형이 많고, 각형인 경우 외형만 각형이고 내부는 원통인 경우가 많은데, 본 출품작은 내·외부 모두 육각형을 이루고 있다. 몸체 각 면은 격자문을 투각하여 마치 창살처럼 나타냈다. 저부의 여섯 개의 다리는 아래가 단을 이루고 끝이 살짝 외반하였다. 다리와 다리 사이에 풍혈風穴을 내어 목제木製처럼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저부는 대칼로 깎아 누른 흔적이 확인되며 여섯 개의 굽바닥에는 내화토받침흔이 남아 있다. 필통의 성형법, 시문기법, 세부문양 등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자기제 필통 가운데서도 매우 단정하고 상당히 공들여 제작한 수작임을 알 수 있다.
[참고자료]
德園美術館,『朝鮮時代陶磁名品圖錄』, 1992.
류주형,「조선후기 백자필통 연구」,『문물연구』38, 동아문화재단,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