柵溪觀漁圖
少華*藏 斗室*題 癸酉季春 燕使還留柵門 斗室醒叟*少華 偕遊消悶 內閣供 奉 金畵師* 筆
소화 소장, 두실 씀. 계유년 늦봄, 연행사신이 돌아오며 책문에 머물 때, 두실, 성수, 소화가 함께 걱정을 달랬다. 내각공봉인 김 화사가 그렸다.
[인장] 小華, 臣得臣, 竹賓
*少華: 소화 이광문(李光文, 1778-1838): 1812년(순조 12) 연행사 서장관書狀官
*斗室: 두실 심상규(沈象奎, 1766-1838): 1812년(순조 12) 연행사 정사正使
*醒叟: 성수 박종정(朴宗正, 1755-?): 1812년(순조 12) 연행사 부사副使
*金畵師: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 1812년(순조 12) 연행사 화사畵師
이 작품은 소화 이광문이 소장하다가 운미 민영익(芸楣 閔泳翊, 1860-1914)의 소장품이 되었다. 이 사실은 화면 우측의 ‘죽빈竹賓’이라는 민영익의 인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본 출품작 <책계관어도>는 1812년 겨울 동지사로 연경에 갔던 조선의 사신단이 임무를 마치고 그 다음해 1813년 계유년 늦은 봄 3월에 귀국을 하기 직전 조선과 청의 국경인 책문柵門 통관通關을 기다리며 소일하고 있는 모습을 시냇가 언덕에 올라 그린 것이다. 멀리 천산만봉의 산들이 첩첩이 둘러있고 너른 들판 끝에는 버드나무 등이 심어져 있는 빈터의 목장 마을에 말들이 한가하게 풀밭을 거닐고 있다. 근경에는 시냇가 언덕 위 버드나무 밑에 차일이 쳐지고 그 아래에 조촐한 안주상과 술병이 놓여 있고 네 사람의 갓을 쓴 양반과 심부름하는 총각이 한 사람 그려져 있다. 시내 건너 왼쪽으로는 ‘유조변柳條邊’이라 불리는 목책이 저쪽 산기슭까지 쳐져 있다.
그림의 우측 상단에는 책계관어도柵溪觀魚圖라고 큰 글씨로 제목을 썼고 그 옆에는 ‘소화가 소장하고 두실이 쓰다. 少華藏 斗室題’라는 낙필과 ‘소화小華’라는 낙관이 찍혀있다. 그 옆으로는 ‘1813년 3월 연행사가 돌아와 책문에 머물다. 두실, 성수, 소화가 함께 노닐며 걱정을 덜었다. 내각 공봉 김화사가 그렸다癸酉季春 燕使還留柵門 斗室·醒·少華 偕遊消悶 內閣供奉 金畫師 筆’이라고 윗면 가득 화제가 쓰여 있다.
임신년의 동지사는 정사 심상규(沈象奎, 1766-1838), 부사 박종정(朴宗正, 1755-?), 서장관 이광문(李光文, 1778-1838)을 사신단으로 하여 1812년 10월 22일에 하직 인사를 하고 사절단의 임무를 수행하고 그 다음해인 1813년 2월 25일에야 북경을 출발하여 3월에 책문에 도착하였다. 심상규, 박종정, 이광문은 두실, 성수, 소화라는 호를 썼다.
두실 심상규의 문집 『두실존고斗室存稿』에는 동지사에서 돌아와 책문에 머물 때의 상황을 말해주는 시가 한 수 있다.
책문 앞에 기다리는 것이 닷새나 되어 시냇가에 걸으며 시름을 달랬다. 부사, 서장관과 함께 읊다.
斗室存稿]卷1 詩 留柵待門已五日 步溪上遣憫 與副行人·行臺同賦
羈愁限柳樊 유조변에 메인 시름
截若阻關嶺 엄절하기 관령에 막힌 듯
長途已淹歲 오랜 여정 이미 해를 넘겼고
滯留當舒景 머물러 경치를 보게 되누나
權履局無適 신발 신고서 갈 곳이 없고
巾衣?不整 의관은 게을러 흐트러졌네
強步門前溪 억지로 책문 앞 시내 걸으니
幽鬱要暫屛 답답함 잠시나마 없어진다네
猶如魚出? 그래도 통발에 고기 나오니
未離蛙坐井 개구리처럼 앉아 떠나지 않네
網人笑少獲 그물에 걸린 것 적다고 웃지만
薄醪肴寸鯁 막걸리에 송사리 안주라
憫飮不成醉 걱정 속에 마시니 취하지 않고
客懷無可逞 나그네 회포를 풀기 어렵네
落日滿前墟 낙조는 빈터에 가득 비치고
倦眺聊遠騁 무심히 멀리 경치를 보네
夕雲蘸水鱗 저녁 구름 물비늘에 잠겨있는데
春燒延山頂 봄꽃은 불타듯 산정까지 이어지네
詩思苦欠神 괴로이 시상 떠올리고
酒力旋失猛 술기운에 도리어 기세를 잃네
行止久聽人 오고가며 오래도록 남의 말 듣고
勞役但深警 힘든 일은 다만 깊이 경계를 하네
相將在隘路 서로 간에 애로가 있으니
隨處得悟境 곳곳에서 깨닳음을 얻게 되누나
緬懷?歟歎 잗다란 회포를 돌아오며 탄식하고
恐趨小人倖 소인의 요행 따른 것 두려워하네
南冠笑相對 남관 쓴 죄수는 서로를 웃고
此苦當共省 이 고생 마땅히 함께 살피네
책문 안에서 통관되기를 기다리며 닷새나 지나니 울적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책문 앞 시냇가 언덕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푼다. 무슨 일로 바로 통과하지 못하고 닷새나 기다렸을까? 이렇게 답답한 마음을 풀려고 책문 시냇가 언덕에 올라가 ‘내각 공봉 김 화사’가 그린 것이다.
내각 공봉 화사란 내각內閣 즉 규장각에 소속되어 있던 화원을 말한다. 이때 규장각에 소속되어 있던 화원으로 이 동지사행에 따라갔던 사람은 누구인가? 이때의 연행 기록을 아직 찾아볼 수는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좌하단에 찍힌 ‘신 득신臣得臣’이라는 낙관을 통하여 이 그림을 그린 화원은 김득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812년 연경으로 사행을 떠났던 삼사三使(正使, 副使, 書狀官)는 1813년 2월 25일 연경에서 출발한다고 치계馳啓하였다. 당시 연경사행로는 책문-봉황성-성경-거류하-산해관-삼하현-통주-연경으로 이어졌는데, 사행의 임무를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마지막 관문인 압록강 건너의 책문에서 소일하며 함께 간 내각 공봉 화사가 그림을 그려 남겼다.
조선에서는 중국에 1년에 두어 차례 사신을 보냈다. 사행단에 속했던 화가들은 새로운 예술과 문화를 직접 접하고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사행의 여정과 문화교류의 결실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중 중국 견문을 간절히 염원하던 72세의 강세황이 부사로 합류했던 사행기록이 있다. 그의 일행은 산해관山海關을 지나 북경에 이르는 길에 접한 경치를 화폭에 담고, 시를 적어 시화첩을 제작하였다. 사행길에서 만난 기이한 세 가지 경치를 담은『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과 북경 호수에서 펼쳐진 빙희(氷戱: 얼음 위에서 펼치는 묘기)를 그린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은 삼사(이휘지, 강세황, 이태영)가 함께 그림과 시로 사행의 경험을 담은 시화첩으로 유례가 없는 매우 독특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 출품작 역시 연행기록을 담은 그림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하겠다. 이 그림은 상단의 화제를 통하여 서장관인 이광문이 소장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광문은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박景博, 호는 소화小華이다. 증조는 도암 이재陶菴 李縡이고, 아버지는 호조 참판 이채李采이다. 19세기 초반 화원들을 후원하는 경화사족의 한 사람이다.
화제?題를 쓴 두실 심상규도 많은 장서와 서화골동을 수집한 소장가, 서화가로서 유명하다. 심상규는 초명이 상여象輿이고, 자는 가권可權·치교穉敎, 호는 두실斗室·이하彛下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정조의 지우知遇를 받아 상규라는 이름과 치교라는 자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문신이자 학자로서 시문詩文에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수많은 장서藏書와 서화고동물書畵古董物 수집을 즐겼던 것으로 유명한 서화가이다. 부친은 규장각 직제학·예조참판 등을 지낸 심염조沈念祖이다. 부친의 장서 1만여 권을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겼으며, 귀중본과 희귀본을 많이 수집하여 당시 장서가 많기로 첫 손꼽혔다. 골동서화의 수집과 완상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고금의 서화와 기석奇石, 오래된 고동기를 모아서 ‘가성각嘉聲閣’이라는 소장처를 집안에 마련하고 보관하였다.
가성각의 편액은 옹방강의 글씨였다.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린 김득신은 그림의 명문 개성김씨 출신이다. 김득신은 자가 현보賢輔, 호는 긍재兢齋, 초호는 홍월헌弘月軒이다. 김응리金應履의 아들이며, 화원이었던 김응환金應煥의 조카이다. 화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한중흥韓重興의 외손자이다. 개성 김씨 가문은 김응환 때부터 도화서 화원을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명문 화원 가문을 이루었다. 김득신은 화사군관으로 초도 첨사椒島僉使를 지냈고 동생인 김석신金碩臣, 김양신金良臣, 그리고아들인 김건종金建鍾, 김수종金秀鍾, 김하종金夏鍾이 모두 화원이었다.
김현영(낙산고문헌연구소 소장,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