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기 양구楊口에서 제작된 백자로 추정되는 본 작품은 청화의 농담을 구현하며 횡으로 초충도를 시문하였다. 마치 한 폭의 맑은 수채화를 연상케 한다. 국화의 줄기와 나비의 표현이 매우 유연하며 특히 구연에 장식된 조밀한 선문線紋은 현대 적인 감각을 느끼게 한다.
양구백자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 ‘토산土 産’(1432)에 등장한다. 조선 초 139개소에 달했던 자기소가 16세기에 들어 32개 소로 축소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강원도에서는 유일하게 ‘양구’만이 기록되고 있어, 15-16세기 도자기 생산의 요지였음을 보여준다.
기록에 따르면 양구는 도자기 이외에도 백토 산지로 숙종, 영조, 정조에 이르기까지 양구의 백토에 대한 높은 평가 전해진다.
일제치하 이후, 양구군 장평리에 1913년 4월에 창립된 ‘도자기개량조합’에서 사기 그릇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장평리 가마는 고려말부터 조선 전후기를 거쳐 20세기 중반까지도 지속적으로 자기 생산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