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滄浪 조선창랑
[인문] 書畵之印
창랑 홍세태는 1675년 을묘식년시에 역과에 응시, 한학관으로 뽑혀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제수되었다. 1682년 30세에는 윤지완(尹趾完, 1635-1718)을 따라 통신사행 자제군 관子弟軍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는 한시에 대한 재능을 널리 인정받았으며, 비절하고 그윽한 서정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특히 능하였다. 또한, 위항문학의 발달에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는데, 중인층의 문학을 옹호하는 천기론을 전개하였다.
본 작품은 각각 산수를 배경으로 인물을 작게 그려 넣었다. 두 점 모두 화면의 대부분을 여백으로 처리하였으며, 어부를 그린 화면에서는 상단 전체를 바위산으로 표현하고 그 아래 흐르는 강 위에 여유로운 어부를 표현하여 대담한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산수와 작은 마을, 마을로 돌아가는 듯한 인물을 표현한 화면에서는 간략하면서도 힘찬 필력으로 표현하여 그의 화풍이 잘 드러난다. 각 화면 하단 좌우측에 ‘朝鮮滄浪조선창랑’으로 쓰여 있어 통신사행 때 작품으로 사료된다. 홍세태의 회화작품은 현재 전해지는 작품이 거의 없으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수도> 작품에도 ‘朝鮮滄浪조선창랑’이라 서명하고 '書畵之印'이라는 같은 도장을 찍은 작품이 전해지며, 일본 유현재 컬렉션 구장의 작품에서 같은 서명과 도장이 확인된다. 이러한 작품들은 통신사행 중 제작했을 것으로 생각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