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黃鶴峯, 以峯下多松花, 鶴背俱黃故名. 余多用胭脂點花, 房櫳斑駁, 故名吾居曰絳雪堂. 황학봉黃鶴峯은 봉우리 아래 송화松花가 많아 학의 등이 온통 누렇게 변했기 때문에 붙은 이 름이다. 나는 연지臙脂를 많이 써서 꽃을 그리므로 방의 창문이 알록달록 하기 때문에 나의 집 을 강설당絳雪堂이라 이름하였다.
元祐石銚庵主人 원우석요암주인
[인문] 在家梅花頭陀
<대나무>
王濛云, 性至通而自然有節, 此義於寫竹得之.
왕몽王濛에 대해 평하기를 “성품이 지극히 통창하면서 자연히 절개가 있다.”라고1) 하였으니, 이런 의미는 대나무를 그리는데 적합하다.
[인문] 書可怡性
1) 왕몽에……있다: 왕몽은 동진東晉의 청담가淸談家인데, 인용된 말은 그의 친구 유담劉惔 이 왕몽을 평한 말이다.
조선 후기에서 말기로 이행되는 시기를 살았던 조희룡은 여항인閭巷人으로 여러 문인들을 비롯한 중인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문학과 회화 등의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한 화가 중 한 명이다. 묵장墨場의 영수領袖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당대 서화가들 사이에서는 영향력이 강했던 조희룡은 여항문인으로는 거의 최초로 독립적 회화 이론서라 평가받는 문집을 저술 하였는데, 기존 중국 화론의 영향이 강했던 시기에 남종문인화론을 계승하면서도 주체적인 자의식에 입각하여 독자적 예술론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의 신분 상황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는데, 기존 전통적 문인화론인 남북종론이 신분 차별적 시각에 입각한 것에서 벗 어나 화파의 구분을 넘어 화가와 회화 자체에 주목한 화론을 제시하였다.
조희룡의 가계를 보면 개국공신인 조준(趙浚, 1346-1405)의 15대 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났 는데, 본래 높은 벼슬의 관계에 진출한 문반 가문이었으나 조부부터는 낮은 무관 벼슬을 지 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증조부대 신분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으로 추정되며 조희룡에 와서 는 중인계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희룡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와 사제의 관계로도 언급되는데, 이는 조희 룡이 김정희에게 난을 배웠다는 기록, 조희룡의 필법이 김정희와 유사하다는 평가와 서로 주 고 받은 글 등을 근거로 한다. 하지만 조희룡은 김정희와 추구하는 예술 세계가 상이했던 것 으로 보이는데, 김정희가 남종문인화론을 바탕으로 하였던 것에 반해 조희룡은 전통적 문인 화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본 작품은 조희룡이 그린 대나무와 매화 대련으로 댓잎은 자유분방하게 그려졌으며 먹의 농 담을 통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대나무에서 느낀 바를 함축하여 담아내고, 왕몽에 대한 평을 화제로 써 묵죽과 어우러지고 있다. 매화는 하단에서 좌측으로 치우쳐 뻗어있으며, 우측에는 매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강설당絳雪堂에 관한 화제를 쓰고 있다.
조희룡은 중년기 이후 소재에서 묵난화보다는 묵죽과 묵매를 선호했는데 이는 미적 지향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필一筆로 감성을 절제하여 문인적 품격을 담아내는 묵난화보 다는 시각적 감흥과 정감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묵죽과 묵매를 지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1. 김지선, 「又峰 趙熙龍의 梅花圖」, 『미술사연구』21, 미술사연구회, 2007.
2. 백인산, 「秋史派의 墨竹觀 - 趙熙龍과 許維 中心으로 -」, 『동악미술사학』7, 동악미술사학회, 2006.
3. 장은영, 「조선 말기 조희룡(趙熙龍)의 화론(畵論) 연구 : 여항 문인화가로서의 화가와 회화에 대한 인식 변화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