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작품은 호연 엄선(浩淵 嚴璿, ?-?)이 그린 쌍록도雙鹿圖에 미산 권영좌(米山 權永佐, 1782-1830)가 서문을 쓴 것임을 그 내용을 통해 확
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권영좌의 서문에서는 미산 권영좌 본인을 포함해 형암 김훈(迥庵 金壎, ?-?), 학고 윤정현(鶴臯 尹定鉉, 1793-1874),
호연 엄선 등의 인물 관계가 서술되고 있다. 특히 쌍록도의 내력에 관하여 일찍이 학고 윤정현과 함께 있을 때 미산 권영좌가 호연 엄선에게
그림을 그리기를 권하고 이에 호연 엄선이 쌍록도를 그리고 학고 윤정현이 평 했다는 내용이 잘 드러나고 있다.
미산 권영좌는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1782년에 태어났으며, 1817년에는 동지사은사冬至謝恩使의 정사 한치응(韓致應, 1760-1824)을 수행
하여 청에 다녀오기도 했다. 1822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리로서의 경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권영좌는 창평昌平에 거주할 때 호를 정산晶
山이라 하였고 이후 횡성橫城으로 이주하여 호를 미산으로 바꿨다.
학고 윤정현은 본래 침계梣溪라는 호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윤정현은 부친인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이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에 연루되면서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된 후 1835년 관작이 복구되기까지 정치적으로 금고禁錮된 시기를 보낸 인물이기도 하다.
미산 권영좌와 학고 윤정현 등은 당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7),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등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과의 교유 관계가 확인되는 인물들이다. 본 작품은 이들을 비롯하여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형암
김훈, 호연 엄선 등의 인물 관계가 확인되는 자료로 그 내용만으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소장기를 보면 미산 권영좌가 형암 김훈을 통해 호연 엄선을 알게 되고 이들이 서로 교유하며 그 사람의 재능을 알게 된 사연이 한 편의 소
설처럼 자세하게 전개된다. 호연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을 슬퍼하고 그가 그린 쌍록도에 담긴 옛 시간들을 반추하면서 서문을 쓴 미산
은 호연이 당초에 어떻게 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쌍록도의 그림 배경은 물론 자신이 소동파를 빗대서 표구까지 하게 된 전 과정을 마치
파노라마처럼 글로 남겼다. ‘쌍록도’라는 힘 있는 글씨, 쌍록도를 그리게 된 배경과 그리는 과정은 물론 이 작품이 보관되었다가 이전되어 표
구까지 다시 하게 된 내력이 고스란히 담긴 스토리가 있는 서화축書畵軸이다. 미산의 정갈한 글씨와 글, 그리고 한가로이 노니는 두 마리 사
슴과 생황을 부는 목동이 잘 어우러진 그림까지 잘 보관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그 시대의 생활상과 의식, 우정을 핍진逼眞하게
엿볼 수 있음은 물론이고 당대 문인들의 교유 관계를 보충해 줄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김봉남,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해배(解配) 이후 교유관계에 대한 고찰(1) -前期(1818~1827)에 限하여-」, 『동방한문학』88, 동방한
문학회, 2021.
김영진, 「酉山 丁學淵의 회인시 연구 - 「秋日懷人絶句十一首」를 중심으로 -」, 『한국시가연구』40, 한국시가학회,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