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도를 왕실에서 사용한 가장 이른 기록은 태종太宗 13년(1413)에 서연관書筵
官에서 병풍을 제작할 때, 그림을 내용을 『효행록』에서 발췌하고 그 위에 이제현의
찬과 권근權近의 주를 써넣은 후, 세자世子가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그 뜻을 풀이
하라고 시켰던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조선전기의 효자도 병풍은 『효행록』에
기록된 고사들을 내용으로 제작되었고, 그 목적이 교육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효자도병풍에 관한 다른 왕실 기록들도 모두 왕세자와 관련되어 있으며, 효자도는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의 화재畵材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효자도는 조선 초부터 왕실과 사대부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궁중에서는 감계적 성
격의 회화로서 왕실에서 세자들의 효행의 고취, 효자에게 내리는 하사품으로 사용되
었다. 일반 민가에서는 효행의 뜻을 견지하기 위해 제작되기도 하였다. 현재 전해지
는 효자도 병풍은 대부분 조선후기와 말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사료된다. 효자도병풍
에 그려진 효행고사는 일정하게 정해진 것 보다 다양한 조합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에서는 24효도 병풍 전통이 유행하였고, 조선에서는 8폭 또는 10폭으로 구성된 효
자도 병풍이 유행하였다.
본 작품은 6폭의 병풍으로 <노자반의도老子斑衣圖>, <자로부미도子路負米圖>,
<문왕문친병도文王問親病圖>, <벽포쇄소도薜包灑掃圖>, <황향선침도黃香扇寢
圖>, <민손단의도閔損單衣圖>의 주제의 내용이 그려져 있다. <노자반의도老子斑
衣圖>는 70세 노래자가 90세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재롱
을 부리는 장면이고, <자로부미도子路負米圖>는 부모님을 위해 백여 리 멀리서 쌀
을 구해서 지고 온 이야기이다. <문왕문친병도文王問親病圖>은 모친이 병이 나자
매일같이 손수 탕약을 올리는 장면이다. <벽포쇄소도薜包灑掃圖>는 계모의 이간질
로 집에서 쫓겨난 설포가 매일 집안 청소를 게을리 하지 않고 청소를 깨끗이 한 내용
을 담고 있다. <황향선침도黃香扇寢圖>은 아버지를 위해 여름이면 침상에 부채질
을 하고, 겨울에는 자신의 몸으로 침상을 덥히는 모습이다. <민손단의도閔損單衣圖
>는 아버지가 약한 계모와 두 아들을 쫓아내려 하자 민손이 부친을 설득하였다는 내
용이 그려졌다.
[참고문헌]
이수경, 「朝鮮時代 孝子圖 硏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전공
박사학위논문,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