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회화사 시대구분에 따라 조선 후기에서 말기로 이행되는 시기를 살았던 조희룡은 여향인閭巷人으로 여러 문인들을 비롯한 중인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문학과 회화 등의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한 화가 중 한 명이다. 묵장墨場의 영수領袖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당대 서화가들 사이에서는 영향력이 강했던 조희룡은 여항문인으로는 거의 최초로 독립적 회화 이론서라 평가받는 문집을 저술하였는데, 기존 중국 화론의 영향이 강했던 시기에 남종문인화론을 계승하면서도 주체적인 자의식에 입각하여 독자적 예술론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의 신분 상황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는데, 기존 전통적 문인화론인 남북종론이 신분 차별적 시각에 입각한 것에서 벗어나 화파의 구분을 넘어 화가와 회화 자체에 주목한 화론을 제시하였다. 조희룡의 가계를 보면 개국공신인 조준(趙浚, 1346-1405)의 15대 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본래 높은 벼슬의 관계에 진출한 문반 가문이었으나 조부부터는 낮은 무관 벼슬을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증조부대 신분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으로 추정되며 조희룡에 와서는 중인계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희룡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와 사제의 관계로도 언급되는데, 이는 조희룡이 김정희에게 난을 배웠다는 기록, 조희룡의 필법이 김정희와 유사하다는 평가와 서로 주고 받은 글 등을 근거로 한다. 하지만 조희룡은 김정희와 추구하는 예술 세계가 상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희가 남종문인화론을 바탕으로 하였던 것에 반해 조희룡은 전통적 문인화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본 작품은 조희룡의 묵죽도 대련으로 댓잎은 자유분방하게 그려졌으며 먹의 농담을 통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대나무에서 느낀 바를 함축하여 담아내고 있다. 조희룡은 중년기 이후 소재에서 묵난화보다는 묵죽과 묵매를 선호했는데 이는 미적 지향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필一筆로 감성을 절제하여 문인적 품격을 담아내는 묵난화보다는 시각적 감흥과 정감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묵죽과 묵매를 지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희룡의 묵죽도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묵죽도>가 참고된다.
[참고문헌] 김지선, 「又峰 趙熙龍의 梅花圖」, 『미술사연구』21, 미술사연구회, 2007. 백인산, 「秋史派의 墨竹觀 - 趙熙龍과 許維 中心으로 -」, 『동악미술사학』7, 동악미술사학회, 2006. 장은영, 「조선 말기 조희룡(趙熙龍)의 화론(畵論) 연구 : 여항 문인화가로서의 화가와 회화에 대한 인식 변화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
[참고도판] 조희룡, <묵죽도>, 종이에 수묵, 127×44.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덕수1153).
[수록처] 『幽玄齋選 韓國古書畵圖錄』, 1996, No.126.
鄭板橋云 我竹多得于紅窓粉壁 日光月影中 此幅 盖得此意 정판교鄭板橋가 이르기를, “나는 대나무를 지창紙窓과 분벽粉壁 그리고 해가 비칠 때나 달 그림자가 있을때 그린 것이 많다.”라 하였다. 이 그림 한 폭은 대개 이러한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인문] 銅雀硯墨花新羲, 趙熙龍印 又峰